Where the hell is Matt?

계속 보다보니 소스라치게 감동적이네요…

끝까지 보세요. 판문점, 남대문도 나옵니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세상이 하나가 될 것 같은 영상입니다.

 

 

유튜브에 달린 덧글 중 기억에 남는 문구를 옮겨봅니다.

 

‘사람이 삶을 살면서 이룰 수 있는 것들은 무수히 많지만

맷, 당신이야말로 진정 무언가를 이루어냈군요.

대통령이 되느니 당신의 신발이 되겠습니다.’

 

 

p.s –

간략한 히스토리를 들려드리자면…

동영상을 만든 맷하딩은 원래 게임개발자였는데

회사에서 “Destroy All Humans“라는 게임을 맡기자

사표를 내고 여행을 떠났다고 합니다. -_-;

이때 만든 비디오가 입소문을 타며 총 3개의 “Where is Matt” 시리즈가 탄생!

(물론 두번째부터 스폰서가 생겼구요~ 위에 올려놓은 영상은 가장 최근 2008년도 버전!

14개월간 42개국을 방문했다는군요.

여담으로 유튜브 창업자가 자신의 포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영상으로 맷하딩을 꼽았다고 합니다. )

반지하에서 꿈을 이룬사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글을 쓰고 난후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듯 했고 어제는 종일토록 몸져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열다섯살때부터 지금까지의 고생했고 때론 치열했던 삶을 몇시간만에 글로 써내려간다는것이 쉽지 않았을수도 있고 글을 쓰면서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 생각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썼기에 몸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벼랑끝까지 몰리고 몹시도 힘들때는 오히려 독한 마음 때문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작은 일에도 눈시울을 적시곤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격려와 용기를 주는 댓글들을 읽어가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평생 흘릴 눈물을 이번에 모두 쏟아낸 느낌인데…………..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분들이………이 모든게 꿈만 같습니다. 저에게는 상상도 못할일입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이외에는 다른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글을 남겨주신분들에게 일일이 댓글을 남겨드리고 싶지만 며칠 몇밤을 새워도 못할것 같아서
이글로 대신합니다. 많은분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께서 해주신 격려의 말씀 반드시 인쇄해서 벽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읽어볼겁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힘이되고 가치있고 소중한 글입니다.

 

그리고 소설이다…부터 시작해서 몇몇분들이 의심하는 댓글을 읽을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맞다, 아니다의 논쟁도 있고  저에게 좋은 말씀을 남겨주신분들에게까지 욕설을 하는것에는 솔직히 분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동생들과 내가 힘을 합쳐 일군 우리집으로 다음주 일요일에
이사를 간다는것 자체가 기뻤고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글을 쓰다보니 사실관계를 자세히 쓰지 않아서 분명 의심할수도 있었을겁니다.
또한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정면, 측면에서 보는것이 서로 다르듯이 일반적으로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한폭에 근거해서 말을하기
마련이므로 제 입장이 되어서 살아보지 않는한은 이해하기가 어려울수도 있겠구나…..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욕을 하는것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어느분의 리플중에 “인증샷”을 올리면 해결된다는
말이 있는데 처음엔 그게 무슨말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컴퓨터에 올리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카메라
빌려서 오랜 씨름 끝에 겨우겨우 올리는방법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결국 중졸티가 나는것 같습니다.^^

 

사진을 올리긴 했는데 제대로 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집을 사게 해준 통장들인데 세어보니 70 여개 되는것 같습니다. 아마 모두 모았다면 백개도 더 넘었을텐데 이사할 때 초창기 통장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상업은행 통장도 있고 개설일자를 보니 91년도에 만들었더군요. 농협의 VIP통장도 있는데 상업은행통장과 농협의 VIP 통장을 보니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업은행 있는 건물에 보통의 예식장이 있었고 잡일등을 맡아서 했었는데 일하시는분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고 많은사람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했고 몸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기 때문이어서 상업은행통장이 반가웠고 몇년전 농협의 VIP통장은 무담보로
2000만원을 즉석에서 대출할수 있는 특혜도 있던 통장인데 통장만으로도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게 느껴지기도 하고 슬프기도하고
기쁘기도 하고 기분이 참으로 묘합니다.

 

제가 IMF 시절에 구입했던 등기권리증입니다. 소유주와 등기할 때의 법무사사무소, 그리고 법원의 직인도 일부 가렸습니다.

 

네, 맞습니다. 열다섯살짜리가 당시 할수 있는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 단순 노동의 부품조립하는 중소기업 공장에 들어갔는데 한달 월급이 20만원(나이가 어려서)이었던걸로 기억하고 있고 새벽에는
두시간동안 신문배달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일들을 하면서 고생한것을 글로 쓰려면……너무 어렵습니다.

 


쨌건 신문배달을 마치고 난후엔 반드시 돌리다 남은 신문 한부씩을 가져와서 읽곤 했는데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 대한 기사중에 많이
강조했던것이 가장 먼저 “종자돈을 모아야 한다”라는 말이었고 처음 목표는 백만원, 그 돈이 모아지면 오백만원, 다시
천만원…….이런식으로 목표를 정해서 모아 갔는데 십만원씩 모을때는 천만원이 언제 모아지나….했는데 천만원이 모아진
통장을 보니 “그까짓 일억쯤이야~~” 하면서 간댕이가 부어도 너무 부은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동생들에게 부업을 시킨것은 공장 지하창고에서 마음씨 좋은 주인 할머니집 반지하원룸으로
이사 갔을때 그 주인할머니가 부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형의 눈이나, 코 붙이고 이런걸 하면 한달에 9만원정도 받기도 하였고
마늘도 까고, 봉투도 접고….부업양을 많이 할때는 한달에 20만원도 벌때도 있었습니다.

 

동생들 폐품줍게 한것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신분들은 아마 “폐품”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런것 같은데요. 동생들이 학교 다녀오면서 빈병을 줍기도 하고 새벽에 운동하러 나갈 때 동네한바퀴를 돌면 못같은 철제물, 버려진
책등을 함께 주워오고 당시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니 종량제 같은게 없었을때니까…..그걸 모으는데로 바로바로 팔아서 저금했습니다.

 

속담중에 “티끌 모아 태산”이란게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말이 단순한 속담이 아니고 제 심장에 새겨넣을만한 가장 위대한 “재테크의 좌우명”이라고 여깁니다.

 


에서도 말했지만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이것저것 잡다한 허드렛일을 했는데 예식장에서 일할때가 가장 신나고 좋았습니다. 뷔페에서
나오는 음식이나,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등을 제 형편을 아는 일하는 아주머니들께서 싸주시기도 하고 동생들도 식당에서 설거지등을
돕고 난후에는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일수 있었으니까요.

 

맞습니다. 학력은 중졸이고 나이는 어리고, 저를 처음 고용하시려는 분들은 굉장히
난감해하셨지만 한두달 지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저의 자랑이 되어서 어떻게든 많은분들이 도움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열심히,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또한 처음 몇 년간은 많은 돈도 모으지 못했고 힘들었는데 둘째 동생이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는데 두명이서 월급을 받으니 그때부터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도 경력이 쌓이면서 월급도 올라갔고요.

 

특히 부업이건, 빈병을 줍건간에 돈이 생기면 그날 그날 바로 은행에 가서 입금을
했습니다. 사진 보시면 유난히 새마을금고 통장이 많다는걸 아실겁니다. 그곳의 직원분이 처음에는 저희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사연을 듣고 난후부터 비과세로 적금 넣는방법, 목돈을 정기예탁하는법등을 알려주시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8천만원을 어떻게 모았는지 말도 안된다고 하시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이야 이율이 굉장이 낮아서 적금을 넣어도 큰 돈을 모으지 못하지만 90년 중반만 해도 3년짜리 적금의 이율이 14% 했었습니다.

 

50
만원을 3년불입하면 이자포함해서 2170만원 가량 받았고 한때 그걸 세 개 동시에 넣었던적도 있었는데 비과세로 해서 3년후에
6500만원정도 되었습니다. 모아진 목돈을 1-2년짜리등으로 정기예탁하면 또다시 이자가 붙고, 천만원단위가 넘어가니까 거짓말처럼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한달에 천만원을 번다고 해도 천십만원을 써버리면 한달 십만원 적자이고 한달에 백만원을 번다고 해도 아끼고 아껴서 구십만원을 쓰면 십만원은 저축할수 있습니다.

 

저축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큰 돈도 모을수 있습니다.

 

물론 동생들이 중간에 큰병을 앓았거나 제가 게으름을 피웠거나 욕심을 부려 엉뚱한곳에 돈을 쓰거나 했다면 절대 모을수 없었을겁니다.

 

그리고 중졸치고 맞춤법이 틀린게 없어서 소설이다..라고 하신분도 계시는데 조금 웃었습니다. 만약 대학 나왔는데도 맞춤법이 틀렸다면 그분들은 대학나온사람에게 “중졸”이라고 말할분들 같아서요.

 

글을 잘쓴다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살아온 이야기를 썼을뿐이고
맞춤법이 틀린게 없다면 그건 열다섯살때부터 신문배달하면서 거의 매일처럼 신문을 읽어와서 그런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신문사까지
밝히라는 분도 계실것 같아서 말씀드리면 한국일보를 봤고 장명수 칼럼등을 정말 좋아했고 동생들에게 좋은기사들은 읽어주곤 했습니다.

 

다가구 주택 구입은 이렇습니다.

당시 매매가 3억원짜리 주택이었고 반지하를 1층으로 여겼을때 4층 건물의 12가구가
입주해있는 총 전세보증금이 2억2000만원의 주택이었습니다. 제가 그집을 사면서 큰 실수를 했던건 모아 놓은 8천만원을 몽땅
털어 넣고 수중에는 돈이 없이 집을 산것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역전세대란이 일어나서 큰 고통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세금 700만원은 어쩔수 없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새마을금고에서 대출)
충당했고 도시가스를 놓을때는 한번 대출을 받으면 다시 대출을 못받는줄 알고서 세입자들에게 부탁을 한것이었고 신혼부부의 도움과
마을 금고에서 추가대출을 받을수 있다고 해서 대출받은돈을 합쳐서 도시가스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입자인 신혼부부가 어떻게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줄수 있느냐고 하신분도 계셨는데……..빌려주신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당시 도시가스 놓으면서 세입자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죄송하게도 지금은 제가 돈을 빼줄 형편이
못됩니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말하기를 우리집은 구조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데 기름 보일러라서 안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가스를 놓으려고 하는데 여러분들과 제가 힘을 합칠수밖에 없습니다.

 


룸은 백만원, 원룸은 오십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제가 충당하겠습니다. 여러분중에 돈이 부족하면 형편대는데로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은 결코 없어지는돈이 아닙니다. 201호가 1800만원 전세인데 백만원을 내시면 1900만원으로 전세보증금을
고쳐드립니다. 그러니 세입자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입자들은 거의 모두 거절을 하셨고 때론 모욕을 주기도 했고 다만…주인세대에 거주하는 신혼부부와 친청 어머니란 분이 총 5백만원을 도와주시고 그래서 그 집은 기존 2500만원 전세를 3000만원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보통 다가구주택엔 주인세대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이 입주해서 관리하면서 살지만 집주인이 그럴 형편이 못되면 임대를 하게 되고, 그렇지만 편의상 주인세대라고 호칭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너무나도 고마운 그 신혼부부는 301호에 거주하는 세입자였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임대차보호법이니, 전세와 월세에 따른 집주인의 의무니, 세입자의 권리니 하는것등은 정확히 알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황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을뿐아니라 처음 부딪히는일이라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세를 월세로 바꾸면서 내준 보증금은 어디서 났느냐…..(꼭 청문회 하는것 같습니다.^^)

 

당시 도시가스 놓으면서 3천만원으로 했던 주인세대의 전세가 현재 9천만원입니다. 투룸과
원룸도 거의 당시보다 2.5배 정도 올랐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집주인에게 유리한 전세대란이 두세번정도 났고 짝수년도에
난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투룸의 경우 그때는
2000만원 전세였는데 지금은 2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0만원을 놓을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당시 전세보증금 2억2천만원을
모을때까지 더욱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을 구입하고 난후에도 여전히 반지하에 살면서 돈을 모았기 때문에 일부 보증금을
빼주더라도 월세가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총 보증금이 16000만원입니다.  보통 다른집에 그 정도 보증금이면 월세가
400만원 이상씩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월 200만원 가량 받는데 물론 그것도 큰돈이지만 월세가 주변보다 적은 이유는
평균시세보다 훨씬 싸게 놓기 때문입니다.

 

도시가스 놓을때 신혼부부 친정어머니께서 “집주인 피눈물빼고 들어온”것이라면서 돈을 내주셨지요. 그건 저를 위로하는말임과 동시에 저에게 경고 하는말이기도 한다는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세입자들 피눈물빼면서”까지 돈벌면 안된다는….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집에 사시는 세입자분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혹여 저의글로 인해
불편해하거나 상처를 받으실까봐 올리지는 못합니다. 솔직히 지난번 올린글도 조심스럽습니다. 첫 댓글에도 남겼다시피 저의글이 결코
세입자분들에게 상처가 안되었으면 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를 괴롭혔던 그 분들때문에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현재 살고 있는 이분들도 어쩔수 없이 월세를 살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제 목표는
집 예쁘게 지어서 동생들과 행복하게 사는것이 꿈이므로 집값좀 올랐다고 개구리 올챙이시절 생각못하고 집주인으로 위세를 부리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12월이면 이상하리만치 너무나 외롭고 슬펐습니다. 집이 없다는것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매년 12월이면 용기잃지 말고 힘내라는 편지를 일일이 써서 세입자분들에게 전달을 하고 작지만 마음에
담은 선물을 드리곤 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사실 비단이 곱네, 말이곱네 해도 말처럼 보드랍고 고운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고마움의 마음을 전달했을뿐인데 그보다 더 많은것을 받곤했습니다.

 


금 살고 있는 그분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좋으신분들이십니다. 어떤 세입자분은 아파트 공사자등에서 미장일을 하시는데 여름을 앞두고
우리집 외부의 바닥을 방수시멘트로 보수해놓으셔서 깜짝 놀랬습니다. 단지 그분은 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시다면서 해주셨는데 정말이지….. 그때도 거친 그분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셨던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일때문에, 주변의 다른 집주인들로부터는 제가 혼나기도 하고 욕도 먹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뜻을 굽히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분이 댓글로도 남겨주셨지만 이 세상에는 저보다 더 어렵게 자란분도 계시고 당장 여러분들의 부모님 이야기만 들어도 그게 사실이었을까? 할 정도의 고생을 하시는분들도 있을겁니다.

 

아울러 현재 어려움에 처해있거나 하는분들에게 저의 글이 힘이 되어주고 티끌만한 용기라도 주어질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어느 지하철역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으로 보지 않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으로 보는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것도 기적이고, 진정한 우리집으로 이사를 가는것도, 신혼부부를
만난것도,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토록 많은 찬사와 격려를 듣는것도 모두가 기적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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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과 지금 나의 생활이 뒤바뀌었다고 했을때, 나는 이 분처럼 이렇게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

 출처 : 다음 아고라 광장, 빈배

반지하에서 꿈을 이뤘습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까요….

 

저에게는 부모가 안계십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했듯이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시다가 끝내 눈을 감으셨지요. 부모의 죽음이 어린
두 동생을 길러야 하는 열다섯 소년에게는 얼마나 큰 슬픔이고 공포스러운지 알턱이 없는 막내 녀석이 장례식장에서 저를 보며 자동차
장남감 사달라고 조르던 기억이 납니다.

 

병원비 때문에 빚까지 있었던 탓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우리들의 보금자리마저 경매로 넘어가 쫓겨나다시피 나와야 했고 떠돌이 난민처럼 이모집, 고모집등 친척집들을 돌아다니며
간간히 버티어나갔지만 형편이 넉넉하지 못한 친척들과 사촌들의 상처주는 말때문에 밤마다 눈물짓는 어린동생들을 보자 “우리 힘으로
살아보자”는 결심을 하고 친척집에서 나왔습니다.

 

며칠동안 길거리를 전전하며 지하도에서 노숙까지 해야했습니다.


히 쉴수 있는 방한칸 조차 없는자의 설움과 개뼈다귀마냥 세상에 내버려진것 같은 절망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우리들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부모없는 고아들이라는 슬픔……… 같은것들이 가슴속에서 울부짖기 시작했고 삶을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달리는 차에 치여 죽으면 고통이 덜할까?” “수면제를 먹으면 편히 눈감을수 있을까?”

“물에 빠져 죽다가 불쌍한 내 동생들까지 뛰어들면 안되는데…….”

시팔….사는것도, 죽는것도 내 마음대로 할수 없는 어떻게 된게 이놈의 세상일은 쉬운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형 너무 추워”

 

이까지 부딪히며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막내를 보니 이대로 죽기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죽을때 죽더라도 내 동생들 따듯한 집 한칸은 마련해주고 죽자!” 결심하였고 생활정보지를 통해 가까스로 일을 얻었습니다.

 

사장님께 사정을 하여 지하창고를 방으로 쓸수 있도록 개조했고 그곳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난방이 전혀 안 되어 공사장에서 버려진 스티로폴을 깔고서 잠을 청해야 했고 온종일 밤인지 낮인지 구분이 안 갈정도로 어두웠지만 동생들과 함께 마음만이라도 편하게 잘수 있다는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작은 행복조차도 신은 질투를 느꼈나봅니다.

회사가 부도가 났고 저희들은 또다시 지하창고에서 쫓겨나와야만 했는데 다행히 그동안 모은 약간의 돈이 있어서 그것으로 집을 구하러 돌아다녔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을 보자 집주인들은 하나같이 계약하기를
거절하였고 부동산 사장님이 사정이야기를 해도 냉담한 반응뿐이었죠. 마귀할멈처럼 생긴 어떤 아주머니는 아쉬워 발걸음을 돌리던
저희들의 등뒤에 대고 들으라는듯이 “부모없는놈들 살게 했다가 손이라도 타면 어쩔건데….”란 말로서 저를 서럽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동사무소 같은곳에 가서 영세민등의 사회보장제도 같은걸 활용했으면 좋았을것을,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그 당시 저는 그럴 능력도 요령도 몰랐고 어린 저를 이끌어줄 주변의 관심있는 어른들도 없었습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마음씨 고운 주인 할머니를 만나서 반지하 원룸 여덟평즘 되는 집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지하창고 방에 비하면 창문도 있고 비록 반쪽이긴 하지만 바깥 세상도 볼수 있어서 우리들에겐 천국 같은 보금자리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집에 대한 집착을 하게 되었고 오직 집을 사기위해 돈을 모았습니다.

동생들에게는 빈병, 폐품등 돈이될만한것이면 뭐든지 주워 팔아 돈을 만들라고 교육시켰고 저역시 돈되는 일이라면 어떤것이라도 상관하지 않고 다했습니다.

 

간혹 동생들이 창피해하거나 과자등을 사달라는 철모르는 말을 하면 지하창고방에서 춥게
살던 경험을 일깨워주고 인근의 마당 있는 근사한 목조주택을 보여주며 “동생들아!!! 돈을 모으게 되면 훗날 우리도 이런집에서
살게될것”이라며 설득을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병간호를 하면서 돈없이 큰병을 앓으면
집까지 순식간에 없어질수 있다는걸 체험으로 알게된 저는 영양가있는 음식을 먹여주지 못하지만 튼튼하게는 만들어주고 싶어서 새벽마다
동생들 깨워서 운동시키고 학교 운동장을 돌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제가 공장에 가서 돌아올때까지 직접 돌봐줄수 없는 시간에 혹여 동생들이 못된짓이라도 할까봐 인형눈알 붙이기, 마늘까기등 부업을 시켰고 예습, 학교 숙제등을 검사하여 해내지 않으면 가차없이 매를 들어 혼냈습니다.

 

“1억을 모으자.”

 

그때엔 1억만 있으면 원하는 집뿐만 아니라 뭐든지 얻을수 있을것만 같아서 투잡, 쓰리잡은 기본이고 서너시간 이상은 자본기억이 없습니다. 꿈에서조차도 일을 하며 돈을 모았었죠.

 

십년도 안되어 1억은 아니지만 8천만원이라는 큰돈이 모아졌습니다.

 

그땐 IMF 때문에 전국이 몸살을 앓았고 대형마트에 쌓여있는 흔하디 흔한 과자봉지처럼

“제발 좀 사주세요~”하는 집들이 사방에서 넘쳐나는 상황이어서 집을 마련하는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는 아파트보다는 마당이 있는 집을 원했는데 신문값을 받으러 부동산에 들렀다가 급매물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준공된지 5년도 안된
대지 90평, 건평187평, 총 12가구가 입주해있는 마당은 아니지만 조그만 화단이 있는 다가구 주택을 구입했습니다.

 

당시 등록세, 취득세, 부동산중개 수수료등 포함해서 약 8700만원을 주고 구입을 했고

22000만은 전세 보증금이었습니다.

 

잔금 치루는날 세상을 모두 얻는 기분이었고 동생들에게 집을 보여주며

“훗날 이집 허물고 삼층집 지어서 일층은 형이 살고

둘째는 이층,

하늘을 좋아하는 막내는 삼층에서 살자꾸나….“

 

“애들아! 마당에는 뭐를 심지?“ 라는 질문에

 

둘째 동생은 과일나무를 막내는 목련을 심자고 했습니다.

 

유난히 먹을것에 집착을 보이는 둘째가 막내를 보며

“야 임마, 먹을걸 심어야지 쓸모없는 목련 같은걸 심어서 어디에 쓰냐?”고 핀잔을 주자

 

막내는 힘없는 목소리로 “엄마가 좋아하는 나무였으니까…..”라는 대답에

둘째는 눈물을 글썽이고 저는 별도, 달도 없는 하늘만 바라봐야했습니다.

 

생각해보니 엄마는 요리를 할때나 가끔씩 산책을 하면 항상

“하얀목련이 필때면 생각나는사람….”이란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를 흥얼거렸고

앨범에도 목련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엄마 장례식때 장난감 안사준다고 생떼를 쓰던 막내가 벌써 이렇게 컷구나….

뿌듯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집이 생겼다,라는 큰기쁨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주인세대에 사는 세입자로부터 “방을 빼달라”는
전화가 와서 부동산에 내놓으니 전세매물만 쌓여있고 찾는 사람은 없다 길래 그 내용을 세입자에게 알렸더니 태도가 돌변하면서 한달뒤
이사갈때까지 돈을 빼주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을것이라고 화를 내는것이었습니다.

 

며칠후,

이번에는 또 다른 집에서 방을 빼달라고 하고, 또다른 집에서 연락이 오고………..세입자들이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방 빼달라는 전화가 빗발치는겁니다.

 

그 무렵 건국이후 주택과 관련해 최초라는 말과 함께 세입자의 반란, 벌벌떠는 집주인들, 역전세난등의 뉴스가 흘러나왔고 세입자들에게 보증금을 빼주지 못해 경매로 넘어간 집주인이 자살을 하거나 밤에 도주를 했다는 소식도 들려왔습니다.

 

고민 끝에 내사정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그분들도
이해를 해주실것이란 순진한 생각을 하며 이사가겠다는 집에 들러 사정을 말하니, 어떤 집은 욕을 퍼붓고, 주인세대의 남자는 저의
멱살을 잡고 “부모없고 쥐뿔도 없는놈이 주인행세하려고 이집을 샀느냐, 안빼주면 경매로 넘기고 너를 감옥에 쳐집어넣을것”이라고
모욕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남자는 자기의 말이 허언이 아니란듯이 며칠후 내용증명까지 보내주셨지요.

 

내용증명서에 쓰인 법적인 책임이니, 경매니하는
단어에 충격을 받고 2800만원이었던 전세를 2500만원으로 낮추어 새로운 세입자를 구했고 이사하는날 손해배상 운운하여 행패를
부려 이사비용에 부동산비까지 모두 부담하고서 그 사람을 내보낼수 있었습니다.

 

제가 임대경험이 전혀 없다는것을 알아차린 부동산
사장님이 “집도 넓고 구조도 좋은데 기름보일러라서 안나가는것이다. 도시가스 놓으면 좋을텐데…“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주변주택을
보니 거의가 도시가스로 바꾸던 상황이라 부랴부랴 문의를 해보니 1300만원가량 비용이 소요된다는것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돈을 어떻게 마련하느냐…

 

세입자들과 십시일반하면 될것 같다는 또다시 순진한
생각으로 집집마다 들러 설명을 했는데 기다렸다는듯이 거절을 당했습니다. 세상돌아가는 상황만을 놓고 볼때 돈을 내려줘도
시원찮을판에 도시가스를 놓는조건이라 할지라도 돈을 올려달라고 하니 세입자들도 화가 났을겁니다. 정말로 그분들이 돈이 없었을수도
있었을테지요. 그렇지만 모두가 겪고 있는 위기에 서로에게 윈윈이 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뿐인데 매몰차게 거절들을 해버리니
갈수록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그와중에 가전제품도 멋져보이고 좋은차도 몰고다니는 비록 전세를 살고 있지만 형편이 나을것 같은 집에 들어가 무릎까지 꿇어가며 하소연을 했습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이사가실때까지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사실수 있도록 각서라도 써드리겠습니다. 부모잃고 어린동생들 데리고 한번 살아보겠다고….. 방한칸없는 설움에 한이
맺혀서 이집을 샀습니다. 그 돈을 모으느라 여덟살도 안된 막내조차 폐품을 모았습니다…….부탁입니다. 여기서 주저앉을수
없으니 이번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빌고 또 빌었는데 단돈 십원도 내줄수 없다는것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마침 중국집 배달이
왔는데 짜장면 불어터진다고 저를 내쫓듯이 밀어내더군요.

 

모두 거절당하고 이제 딱 한집 남았는데 얼마전 주인세대로 이사한 신혼부부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감히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었습니다. 비슷한 나이인 그 부부에게 부탁을 한다는것 자체가 자존심상하는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주인세대를 외면하고 두계단을 더 올라가서 옥상으로 갔습니다..

반지하 사는 주제에 이렇게 큰집은 사치였는지도 몰라….이러다가 결국엔 경매로 넘어가겠지. 십년동안 피눈물 나도록 모은 재산 모두 없어지고 모든게 물거품이 될거야…………..

4층에서 떨어지면 숨이 끈어질까? 머리부터 떨어질까? 다리부터 떨어질까…….“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죽고 싶었습니다.

 

어린동생들의 폐품 줍는 모습, 마늘까면서 생긴 주부습진까지….고생하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정말이지 “이젠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주인세대를 들어갔습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금액을 말하기도 전에

 “
없어지는 돈도 아니고 결국엔 세입자 좋은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어요”라며 삼백만원을 선뜻 내놓겠다는겁니다. 그런데 안방에서
친정어머니란 분이 나오셔서  “딸내미가 전세를 엄청 싸게 들어왔다고 좋아했는데 알고 보니 집주인 피눈물 빼고 들어온거였구먼.
그러면 나중에 벌 받지. 나도 이백만원 보탤테니 도시가스 놓도록 해요. 젊은사람이 그동안 어린것들 데리고 사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누…”하시면서 제 두손을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시는데…..저는 그 친정어머니란 분의 품에 얼굴을 묻고서 통곡하다시피
울고야 말았습니다.

 

신혼부부의 도움과 대출을 받고서 도시가스를 놓았습니다.

놀랍게도 도시가스를 놓자마자 그간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세입자들의 전화가 거의 오질 않는겁니다.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진실대로 말한 내 형편을 오히려 악용했고 임대차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나를 길들이려 했구나.” 몹시도 씁쓸했습니다.

 

두어달간 조용하다 싶었는데 이번엔 수도관리국에서
수도세가 50만원이 넘게 나왔으니 누수가 있는지 확인해보라는것이었습니다. 평균 10만정도를 사용하는데
50만원이라니…..너무나 화들짝 놀라서 누수탐지 검사를 해봤는데도 전혀 문제가 없었고 정말이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습니다.

 

다가구 주택이라서 미터기가 하나밖에 없는 관계로
요금을 세대원 머리수대로 나눌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50만원은 너무 많이 나온거였습니다.  당연히 세입자들은 평균보다 초과된
금액은 낼수 없다고 버티었고 40만원의 쌩돈을 물어주게 될 판이었는데 신혼부부가 들려준 이야기는 황당했습니다.

 

어느집은 밤에도 공장에서 나는듯한 소음이 들리고 또한 주말만 되면 이집들은 목욕탕이 되는데 집주인이 살고 있지 않아서인지 세입자들이 아예 물을 폭포수처럼 틀어놓고 사용한다는것이었습니다.

확인을 해보니 문제의 그집은 발디딜틈도 없는 공간에 공장처럼 해놓고 대충 세어봐도 열명은 넘는 인원이 부업같은 일을 하고 있었고 다른집은 주말만 되면 사돈팔촌까지 부르는지 몇십명이 집에서 목욕을 한다는것이었습니다.

 

할수없이 신혼부부에게 부탁하여 집관리를 맡겼는데 세댁이 며칠동안 매시간 계량기 옆에 서서 확인을 하고 집집마다 체크를 하니……다음달 요금이 8만원 나왔는데 그것은 그집 구입하고 난후 최저 금액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수도가 잠잠해지는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203호에서는 수도꼭지가 고장났으니
고쳐달라, 101호는 변기의 물이 잘 안빠지니 아예 양변기 자체를 교체해달라, 302호는 세면대 연결부속이 녹슬어서 보기 싫고
위생상 문제가 있으니 바꾸어달라…..어느집은 형광등에 불이 안들어오니 새것으로 교체해달라는 세입자도 있었습니다. 세입자가
원하는데로 모두 해줬습니다. 안그러면 나가겠다고 으름장을 놓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세입자느 방문 손잡이와 방문을 바꿔달라는 분이었는데 가서보니 아이가 방문손잡이에 매달려서 그네처럼 왔다갔다 하다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박살이 난겁니다.

“이것은 아이의 잘못이니 세입자님이 고쳐야 한다”고 하니,

“아이가 매달리고 놀아도 부서지지 않는 튼튼한 문을 달았어야지, 이따위 싸구려 문을 단
집주인이 잘못이며, 아이가 다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큰일이었겠느냐…”는 정말이지 황당한 주장을 했는데 싸우기도 싫고 안
고쳐주면 나가겠다고 할것이 뻔하므로 울며겨자먹기로 고쳐주었습니다.

 

그리고 일년여가 지난후 뉴스에 “전세가 심상찮다.” 소식이 간간히 흘러나왔고 기다렸다는듯이 이번에는 집주인에게 유리한 전세대란이 일어났습니다.

 

그 소식을 모르는지 방문손잡이의 그 세입자가
이번에는 현관문이 고장났다며 고쳐달라는겁니다. 돌잔치때도 돈이니, 책이니 하는것들은 내팽개치고 분명히 문고리를 잡았을 그집
아이가, 문고리잡고 노는것의 사명을 띠고 이땅에 태어난 아이란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아이는 현관문의 손잡이에 매달려 놀았고
철제문의 경첩이 떨어져나가 고장이 난겁니다.

 

이건 해도해도 너무한다 싶어서 아이의 잘못으로 발생된일이고 당신이 직접 고쳐야 한다고 하니, “안 고쳐주시겠다면 이사갈테니 방빼주세요”하는겁니다.

 

“방빼세요. 돈드리겠습니다.”

 

“내일 당장 이사갈테니 바로 전세금 주세요.”

 

“내일 당장 이사가세요. 전세금 바로 드릴게요”

 

“………………..”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세입자처럼 그토록 당황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아직 못봤습니다.

 

결국 하룻만에 그 세입자는 이사를 갔습니다.

 

이사간 집은 투룸이었고 집을 수리하려하는데
도배장판페인트 해서 200만원가량의 견적이 나왔습니다. 싸게 잡은게 그정도….예전에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한적이 있는데
인테리어는 거의가 인건비라는걸 알았고 겁도없이 직접해보기로 했습니다.

 

인테리어 순서를 몰라서 도배를 두 번하기도 했고 색상을 잘못 골라서 페인트도 여러번 칠했습니다. 퇴근후에는 곧장 그집으로 달려가서 일을 했고 동생들까지 도움을 줘서 한달만에 수리를 마치고 집을 내놨는데 월세로 나갔습니다.

 

그때 집구경을 하던 주인세대 신혼부부 새댁이 “벽지를 소프트 그레이 칼라로 하고 바닥재를 환하게 했으면 거실이 좀더 넒어 보였을텐데…”라는 전문가다운 말을 하길래 물어봤더니 미술을 전공했다더군요.

그때부터는 신혼부부와 손을 잡고 리모델링 프로젝트에 들어갔고 몇 년만에 신혼부부집을 제외한 나머지 11가구를 월세로 돌렸고 세입자들도 모두 바꾸었습니다.

 

주변시세보다 십퍼센트정도 저렴하게 내놓으니 공실률도 거의없고 월세임에도 대기자까지 생길정도였습니다.

 

몇 년전이었습니다.

저의 통장에 천만원이 입금되었습니다.

 

“주인아저씨! 전세금 올려드렸어요. 재계약해요”

 

그집에서 유일하게 전세에 살고 있는 신혼부부에게서 온 연락이었습니다.

 

“전세금을 올린다니요? 말도 안됩니다. 당신들이 평생 산다고 해도 저는 그렇게 해드릴것”이라며 돌려드렸는데 며칠후에 이번에는 이천만원이 입금된겁니다

 

“생각해보니 요즘 시세가 얼마인데 너무 적게 올렸 드렸네요. 이번엔 꼭 받아주세요”

 

쓰리룸에 화장실 두 개인 주인세대가 9천만원까지 올랐는데 원룸가격인 삼천만원에 전세를 살고 있으니 세입자 입장에서는 상당히 미안할수도 있었을겁니다.

 

그렇지만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저는 인생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고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그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올려받으세요“

 

”못올립니다“

 

”올려주세요”

 

“자꾸 이러시면 전세금을 확 내려버릴겁니다.“

 

이렇게 기분좋은 실랑이를 벌이며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대화를 했습니다.

 

저는 할수없이 그돈을 가지고 찾아가 여유돈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아는 분이 소개하기를 경매로 나온 오래된 아파트가 있어 투자해보라고 하는데 저는 이집이면 충분하니 집이 없으면 당신들이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

 

그분들은 5천만원을 투자하여 낙찰을 받았고 몇 년도 안되어 그 지역자체가 재개발되어

2억가까이 올라버린겁니다. 집에 갈때마다 봤는데도 내집처럼 깨끗하게 사용하고 건물청소도 열심히 해주신 신혼부부…. 그동안 도움준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보답을 한것같아서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두달전이었습니다.

 

그 신혼부부가 제게 언제 이사올거냐고 묻더군요.

 

내년에 투룸짜리 계약이 완료되어 거기로 이사갈것이라고 하니 “주인세대로 오지 그러느냐”….하길래, 당신들이 이사가면 그때 갈것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 동생들이 그집을 자주 드나들길래 청소하러 가는줄 알았습니다.

 

오늘 와보라고 해서 그집에 갔습니다.

주인세대를 들어갔는데 완전히 새 아파트처럼 리모델링을 해놓은겁니다.

신혼부부가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저더러 주인세대에 들어오라고 하는겁니다.

 

지하창고의 스티로폼하고는 비할수 없는 침대에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가구들….

인테리어비용 많이 들어갔을것이라 하니…그 신혼부부가 하는말이

“모두가 인건비잖아요. 동생들이 도와줘서 큰돈 안들어갔어요. 남편이 가구공장을 다녀서

모두 저렴하게 구입하고 직접 만든것도 있고……

.이렇게라도 해야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받으실것 같아서 허락도 구하지 않고 공사를 했네요.“

 

너무나 감격스러워서 눈물을 보이고야 말았습니다.

 

다음주 일요일 드디어 동생들과 함께 우리집으로 이사를 간답니다. 이제야 비로서 내집이 된것 같습니다.

광고문구처럼 정말이지 열다섯살부터 지금까지 오직 한길만 보고 달려왔습니다.

돈을 모으느라 정말 모질게 살았고 연애한번 아니 영화한편 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중학교 2학년때 친구들과 몰래 들어가 본 “영웅본색“이었습니다.

아는 가수도 박남정 김완선, 소방차가 전부일정도입니다.

이제는 다시 열다섯 소년으로 돌아가서 하고 싶은걸 하고 싶습니다.

 

부끄럽게도 제 최종학력이 중졸입니다.

이사하면 검정고시 준비해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따고 싶고 대학도 가고 싶습니다.

 

내 생애 최고의 날같은 오늘 저녁…….

많은 사람들이 스쳐지나가지만 그중 부모님이 가장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많은 재산을 남겨주시거나 영화배우같은 멋진 외모를

물려주지는 않으셨습니다.

정말 돈이 필요할땐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고

이토록 모진 세상에 장남으로 태어난걸 후회하기도 했습니다.

 

기억나십니까?

 

제가 열두살 때 친구들 모두 다니는 보습학원조차 못가는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우리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거야.”라며 철없이 대들어 어머니에게 종아리를 맞았을때

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매를 빼앗으며

“때리지 마라. 못배우고 못난 애비가 죄다. 미안하구나…”하시면서 눈물을 보이셨던 아버지…..

어린동생들을 기르면서 한집안의 가장이 느껴야하는 무거운 책임감과

가족들에게 말할수 없는 아픔들을 알게 되었고 이제는 아버지의 눈물을 이해할수 있습니다.

 

아버지….죄송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그곳에서도 어머니에게 못다한 사랑 많이 베풀어주시고 행복하게 사십시오.

 

너무 보고 싶고 사랑하는 어머니….

아니 오늘만큼은 엄마라고 불러보고 싶어.

 

엄마…..

어느새 내가 서른네살 청년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난 엄마의 철없는 아들이고 싶어.

지하창고에서 잘 때 동생들과 아무리 껴안고 자도 추워서 잠을 이룰수 없을때 엄마사진을 꺼내 품안에 넣고 자기도 했어. 그때 막내가 내 귀에 대고 “엄마품처럼 따뜻하다”고 했을때 엄마는 곁에서 우리들을 지켜주고 있다고 생각했어.

 


느시인의 슬픈 싯구처럼 이 세상 소풍 마치던날 엄마는 내손을 붙잡고서 “어린동생들만 남겨두고 가는것이 한없이
미안하다며…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던…..”자식들을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수 있다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울
엄마……엄마가 그토록 좋아하는 수박, 이 추운 날에도 몇트럭을 사줄만큼 돈도 모았건만 엄마는 곁에 없고 그래서 가슴이
찢어지도록 슬퍼……….엄마…..이제는 우리들 걱정하지도 말고 하늘에서는 아프지도 말고……먼훗날 내가 그곳에
가게 되면 엄마품에서 맘껏 울고 싶고 그때가 되면 내가 살아온 이야기 들려줄게. 엄마….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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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분들에 비하면 나는 행복에 겨운거다..

 출처 : 다음 아고라 광장, 빈배

만 팔천원만 벌어와요 ^^

 전 이제 갓 사십대 넘은 주부입니다..

스물두살에 결혼해 2남2녀의 엄마로 살아온지 어언 20년이네요..

여러분들에게 동정을 얻거나 작위적으로 쓴 글이 아닙니다..

그냥 새벽시간에 손님은 없는데 그냥 돌아다니고 있다는 신랑과 통화중에

있었던 에피소드구요.. 저 혼자만의 독백으로라도 신랑에게 제 마음을 한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올려본 글인데..본의 아니게 님들의 관심을 받는 글이 되어있네요..

저도 같이 맞벌이도 하고..그러면서 저희도 살아갑니다.

제가 쓴 글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일상생활이 그렇게 살아가지는 거라는 의미일뿐..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것은 그다지 거창하지않다는것을.. 얘기하고 싶었을뿐이랍니다.

여러분들은 살면서 얼마나 많은것을 잃어보셨는지요..

전 참..많은것을 잃어가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한때는 돈에 목숨도 걸어보고 경제적으로 힘들때 막내를 보육원에까지 맡기며 이혼도

생각해본적이 있었더랬습니다..

푼푼히 저축해서 분양받은 아파트를 순식간에 잃었던적도 있구요.

가족과 떨어져서 생이별을 하면서 살았던적도 있었더랬습니다..

신랑의 실직과 사고..빚독촉도 받아봤습니다..

정말 이 악물고 살았던 세월도 있었습니다..

너무 일찍 세상굴곡을 겪어서일까요.

이제는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를 알게됐다면 넘 오만한걸까요..

세끼 따뜻한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가족들이 있어서 좋습니다…

돈없어 힘들다고 하면 서로서로 아껴가면서 불평하지 않는 아이들이 제게 참

고맙습니다.. 사는것은 어찌보면 하루하루가 모여서 평생이 되는것을요..

오늘 하루가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면..그리고 내일도 그런 마음으로 살 수 있다면..

어느 순간엔 평생을 만족하고 사는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늘 하고 살아갑니다.

그래도 늘 감사한것은 가족 모두 건강하다는것.. 어려울때 서로 다독여주는 지혜를

알아간다는것.. 그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는거..별거 아니라고..전 늘 그렇게 생각합니다..

별거 아닌 제 하루를 읽어주시고 격려해주신 님들 감사합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당신 하루하루 열너덧시간 택시몰고 새벽에 들어오면서

몇만원씩 벌어오는 돈이 내게는 천금보다 소중하고 귀하답니다.

아침에 애들 학교보내면서 필요한 용돈 주는것 말고는

푼푼히 통장에 전부다 넣어버리지요..

어느땐 통장에 넣을 새도 없이 다 나가버리기도 하지만

만원이든 이만원이든  꼬박꼬박 넣어서 모아지면 필요한 공과금 내고

애들 학비에 보험에 전화요금에…. 어느새 통장은 늘 바닥이 나있지요..

우린 늘 필요한 그만큼만 누리고 살아요.

요즘은 손님도 더 없고 경기도 안좋은데 당신은 한푼이라도 더 벌어야겠다고

손님없는 새벽시간에도 이리저리 쉴새없이 차를 몰지요..

어느새 내년이면 대학생인 큰딸.. 고등학생인 큰아들..그리고 중학생 세째..초등생 막내..

우린 그렇게 여섯식구가 그리 풍족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족함도 그리 느끼지않으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지요.

좀전에 당신한테 난 그랬지요

세째녀석이 소풍비 가져가야 한다고 만팔천원..

손님없으면 만팔천원만 벌고 와요~

내일은 만 팔천원만 필요해요..라고 ㅋㅋ

기가막힌지 껄껄 웃던 당신 목소리..

당신이 힘들지 않았음좋겠습니다..

아니 우리 가족모두가 힘들다고 느끼지않고 하루하루에 최선을 다하고

만족하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들 너무 멀리들 보느라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 학비걱정에 먼저 한숨이고

다가오지 않은 노후자금 걱정에 잠시도 마음놓고 살지 못하는 이 현실에서

우린 그냥 바보스러울 만큼 묵묵히 하루만을 충실히 살아가는 모습을

사랑하기로해요..

욕심부리다가 제 욕심에 제가 빠져 허우적거리지 말고..

가장 소중한 것은 정말 지금 현재의 내 모습인것을 잊지않으며

서로 사랑하고 격려하고 감사하고..그렇게 살아가기로해요..

난 참으로 많이 감사합니다..

여러번의 고비끝에서도 다시금 최선을 다해주는 당신에게..

풍족하게 챙겨주지 못하지만 늘 씩씩하고 명랑하고 착한 울 애들에게..

참으로 많은것을 내가 누리고 산다고 생각하며 감사합니다..

오늘 당신 만팔천원만 벌고 와요..

남들에겐 작아보이는 그 만팔천원이겠지만

그  돈이면 우리 하루는 또 아무런 근심없이 행복하게 지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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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아고라 광장 비연님 글

원본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K161&articleId=77334&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sortKey=depth&limitDate=0&agree=F

우물안 개구리

기분좋은 이야기긴 하지만 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KLDP에 실제로 참여하여 문서를 번역하거나 창작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이라면 linuxdoc sgml,
docbook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linuxdoc sgml은 LDP(Linux
Documentation Project)에서 특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txt, html, ps 등의 포맷으로 문서를
제작하기 위해 새롭게 정의한 DTD의 일종입니다. HTML과 비슷한 형태로 소스를 한번 만들어 두면 sgmltool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위에 말씀드린 여러가지 포맷의 문서들을 자동으로 생성해 주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한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와,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따로 정의된 태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최준호씨가 일본 사람의 패치를 참고하여
한글처리 부분을 수정하고 번역자를 명시할 수 있는 태그를 추가하여 몇년째 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linuxdoc
sgml DTD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LDP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것으로서(물론 이것도 어느 DTD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긴
합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최근에는 DocBook라는 포맷으로 전환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DocBook은
linuxdoc 보다는 좀더 “일반적” 입니다. 컴퓨터/기술 문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많은 태그들이 세세하게 정의되어
있지요. 태그가 많은 만큼 기능도 많지만 그에 따라서 처음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더 걸립니다.

그런데 이 DocBook에서도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특별히 정의된 태그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박용주님이 http://docs.kldp.org
를 만들면서 DocBook의 스타일시트를 조금 고쳐서 특정 태그를 번역자를 위한 태그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쳤으며 그 외 다른
내용들 역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지요. 그리고 이를 kldp.dsl이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에서 배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KLDP는 애초에 하우투 문서들을 번역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졌지요. 그리고 지금껏….가장 기본적인 문서
변환 작업에 사용하는 표준 포맷에 가장 기본적으로 명시가 되어야 할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아직 없다는 사실 때문에
linuxdoc sgml DTD도 따로 만들고 DocBook 스타일시트도 따로 만들게 된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정도로 작업을 하는 곳은 별로 없거든요. 대부분 원본의 원 저자 이름 옆에 번역자의 이름을 나란히 넣어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부분에 그냥 대충 추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KLDP도 그런 식으로 작업이 된 경우가 종종 있구요.

그러다 그저께였나…DocBook으로의 전환을 위해 http://docs.kldp.org
에서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여러가지를 의논하던 중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정말로 없는 것일까(DocBook에는 태그가 아주
많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도 알고 싶어서 LDP의 메일링 리스트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몇년째
이렇게 따로 태그까지 추가해 가면서 작업을 하다가 거의 처음으로 KLDP 작업에 대해 직접 메일을 보내본 겁니다.

“우리는 너네들 HOWTO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참여율이 매우 높다. 그런데 번역자를 명시하는 방법이 없어서 우리가 따로 작업을 해 왔는데 혹시 DocBook에서는 그런 방법이 없느냐? 만약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한국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취지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틀도 되지 않아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LDP에는 Author Guid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인데 이곳에 번역자를 위한 섹션이 추가되기로 했고 이미 베타 샘플까지 나왔습니다. 이틀 사이에!
-DocBook에도 역시 번역자를 위한 태그를 DocBook에 정식으로 넣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에 작업하던 linuxdoc sgml의 DTD에 최준호씨가 번역자를 위해 따로 추가한 , 태그를 linuxdoc sgml
DTD를 개정하여 정식으로 추가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패치를 처음 만들었던 일본 사람에게까지 이미 연락이 되었지요.

제가 평소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궁금증, 그것도 KLDP를 몇년째 운영하면서 그냥 머리속에서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필요성을 실제로 풀어놓자 너무도 빨리 실현이 되어 버린 겁니다. 몇년동안의 궁금증과 바램(?)이 단 이틀만에 풀려버린 거지요.
참으로 기쁜 일이긴 하지만 일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 진작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동네(?) 사람들은 좀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
자기가 발견한 문제점들은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알려주기 전에는 개발자가 미리 알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바로바로
알려주고, 자기가 할수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을 들여서 개발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전혀 어려운게 아니죠. 그러한 관심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흥미거리인 것이고 이동네(?)가 굴러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저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다 어렴풋하게 생각을 담아두지 마시고 바로바로 표현을 하십시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는 경우를 분명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멀리서 찾으실 필요도 없이 가까운 곳을 둘러보아도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프로젝트는 수도없이 많습니다. 단순한
사용자에서, 남에게 도움도 되고 스스로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다는 얘깁니다.

부디 자신의 관심과 흥미가 끌리는 곳에 참여하시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해주십시오.
그러다 보면 저처럼 이렇게 감동하는 날도 언젠가 분명히 올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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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kldp.org/node/67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