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블로그 자료 복구

예전 블로그 자료들을 복구하기로 결정했다.

2006년 8월부터 2007년 9월까지의 기간동안의 아카이브.

내가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와서 좁은 고시원 방안에 낡은 PC하나를 가져다 놓고 리눅스며 유닉스며 이것저것 설치하고 실험하고 실습을 했던 그때의 기억들. 그때의 다짐들.

그때(벌써 5년전이다)보다는 훨씬 생활이 나아진 지금. 나는 계속 반성한다.

생활은 나아졌으나 나 자신은 나아진 점이 없다. 열정, 자신감, 그리고 용기.

처음 서울 생활을 했던 그때에는 앞이 보이지 않아 항상 긴장하며 매사에 열심히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조금은 나아진 생활과 그로인해 생겨난 ‘내 것’이라는 것. 그것 때문일까.. 모든일에 소극적이되고 도전을 주저하는 내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성하자.

25살 신용등급 9등급의 넋두리..

안녕하세요. 86년생 25살 남자고요 현재 신용등급 9등급인 참.. 웃기게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새벽에 회사서 이래 저래 인터넷 돌아 다니다 가슴도 답답하고 해서 시원하게 넋두리 한번해 보려 합니다..

 

아버지가 참 술을 좋아하십니다. 밑도 끝도 없이 드시죠..

술을 그렇게 좋아하시니 건강이야 당연히 안좋으시겠죠. 일이요? 연탄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시고

한달에 50만원을 받아 오십니다(2000년도 즈음..)실직적으로 집에 생활비라고 가져다 주시는건 1~20만원..

중학교 입학했을때 왜 그런거 하잖아요 아버지 직장 적고.. 월 수입 적고.. 집은 자가냐.. 월세냐.. 등등

조사해 오라면서 쪽지 주잖아요.. 거기에 아버지 직업 연탄공장 일용직 이라 적고.. 월수입 50만원 적었죠.

선생님이 난데 없이 뒤통수를 때리더라구요 장난 치냐?면서요 어린나이에 다른 생각은 안들고

아.. 다른집 아버지 들은 50만원 보다 더 많이 버시나 보다.. 했죠. 옆 짝꿍 아버지 직업이 군청의 무슨

직급이 있는 직업이고 월수입이 300만 원이라고 써 있더라구요 똑같이 배껴서 냇죠. 교무실서 처음으로

엎드려서 빠따 맞아 봤어요. 별로 아프진 않았어요. 그저 다른 집 아버지들이 궁금했을뿐이죠..

 

천주교에서 연락이 왔죠. 대학 입학금을 후원해 주겠다고요. 등록금이 아니라 입학 예치금인가?

그거 있잖아요 등록금 내기 전 30만원 정도 먼저 내는거요. 얼마나 고맙던지요..

농협에서 이공계 특별 학자금 대출을 신청해서 등록금을 내고 전문대에 입학을 했어요.

대학 입학하기 위해 기숙사로 가기전날 어머니가 돈 5만원 주시더라구요 그 돈 1학년 끝날때 까지

안쓰고 랩으로 싸서 보관 했어요. 그 돈이 어떤 돈인데요. 참 구질 구질 하죠?

 

1학년이 끝나갈 무렵 엄마가 뇌졸증으로 쓰러지셨어요. 병원에서 의사가 하는말이

불행중 다행이라면서 엄마 뇌 사진을 보여 주시더라구요 뇌사진.. 하얀색인데 오백원 짜리 만하게

검은색 부분이 있더라구요.. 그 부분이 뇌의 죽은 부분이래요. 다행이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부분이라면서요

… 아 아버지는 여전히 술 많이 드시죠…

 

그런 어머니를 두고 아버지를 두고 군에 입대했어요.

티비에 뉴스 보면 나보다 더 건강한 사람들 상근으로 빠지고, 면제 되고 하던데 전 슬프게도 1급 나와서

2년 현역으로 다녀 왔어요.

 

전역후 집에 오니 농협에서 고지서가 많이 왔더라구요 학자금 대출 받은거 갚으라구요.

제가 한 상병때 부터 갚아야 했는데 한번도 못냈으니 이 때 부터 벌써 신용이 나빠지기 시작했겠죠.

 

복학은 꿈도 못꾸겠더라구요. 아버지는 더더욱 술 드시고.. 어머니는 점점 건강이 안좋아 지시고..

학교 자퇴를 하고 집 근처 공장( 지금 다니는 공장요..)에 취직을 했어요.

지게차를 배우고 로우더를 배우고 굴삭기를 배웠죠. 한달에 월급 120만원 받아서

집에 110만원을 드려요. 아니 집이 아니라 어머니 드려요.

 

아버지가 이상해 지더라구요. 술 드시면 어머니에게 폭력을 휘두르시고.. 안방이나 마당 , 바지에

대소변을 보시더라구요.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더니 원장님이 그러더라구요

이렇게 될때 까지 술을 드셨냐구요.. 당장 격리병동에 입원 시켜서 치료 받게 하라구요.그러면서

병원 소개 시켜 주더라구요. 찾아 가니 정신병원이더라구요. 알콜중독센타라는 글씨도 작게 써 놨구요

네 . 제가 직접 아버지를 정신병원에 입원 시켰어요. 싸인 제 손으로 다 했구요 ..

절대 슬프지 않았죠.

 

점점 미쳐 가나 봐요 제가…

 

어머니 병원비 아버지 병원비 해서 한달에 100만원이 넘게 들어요.

큰형이랑 작은형은 왜 일을 안하는지 모르겠고요. 정말 모르겠어요. 왜 안할까요..

 

중고차를 하나 사고 싶더라구요. 출퇴근도 좀더 편히 하고 싶고 어머니 병원도 좀더 편하게

모시고 싶었어요. 좋은차 안바라죠. 깨끗한 마티즈 살라고 했죠. 할부로..

제가 신용등급이 낮아서 할부 진행이 어렵데요. 그 때 부터 관심을 갖고 알아보니

제 신용등급이 9등급이래요.

전기세 전화세 수도세 부터 시작 해서 농협 학자금 대출 등등 다 제 앞으로 되어 있어요

돈없을때 연체가 되고 그랬는데 이런것들 때문에 신용등급이 안좋데요..

 

2010년을 살아 가면서 나이 25살이고요 신체 건강한 청년이 400만원 짜리 마티즈 한대를

할부로 못사요. 정말 구질 구질 하게 살고 있죠.

 

지금 새벽 5시 53분이네요.. 일요일 특근은 이제 모두들 내가 한다는게 자연스러워 졌어요

토요일 특근 기본에 일요일까지 일을 해야 된다 그러면 무조건 제가 한다고 손들어요.

주말 야간 특근이면 돈이 엄청나거든요..

 

가끔 인터넷으로 미니 홈피 등으로 제 나이 또래 친구들이 어떻게 사나 간접적으로 봐요

다들 정말 멋지게 재밌게 살더라구요.

‘강의가 많아서 짜증나’

‘어제 클럽에 갔더니.. 술을 많이 먹어서..’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했더니..’

 

저도 저렇게 살고 싶은데.. 저렇게 살라고 하면 살수 있는데..

 

집에 가서 문 열면 파스 냄새가 참 정겨워요. 연탄 가스 냄새도 이젠 별로 힘들지 않구요.

 

제가 지금 25살에 신용등급 9등급이지만 나라를 원망하고 부모님을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한적은

단 한번도 없어요. 다 내 잘못이니깐요.

 

전 30살 때 즈음…  정말 남들 만큼은 살거거든요? 악착 같이 벌고있어요.

(제 좌우명:개같이 벌어 절대 쓰지말자)

 

만약 몇년 뒤에도 이 사이트가 존재 한다면 꼭 다시 글 한번 남길게요.

 

‘ 나 그렇게 살았던 사람인데.. 지금은 이렇게 잘살고 있다고. 찌질하게 안울고 산다고..’

다음 아고라 광장,
처음과같이영원히 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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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사치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반지하에서 꿈을 이룬사람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글을 쓰고 난후 온몸의 수분이 빠져나가는듯 했고 어제는 종일토록 몸져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열다섯살때부터 지금까지의 고생했고 때론 치열했던 삶을 몇시간만에 글로 써내려간다는것이 쉽지 않았을수도 있고 글을 쓰면서 과거의
일들이 하나둘 생각나면서 눈물을 뚝뚝 흘려가면서 썼기에 몸이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벼랑끝까지 몰리고 몹시도 힘들때는 오히려 독한 마음 때문인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는데 언제부터 작은 일에도 눈시울을 적시곤 합니다.

 

너무나도 많은 분들의 격려와 용기를 주는 댓글들을 읽어가면서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립니다. 평생 흘릴 눈물을 이번에 모두 쏟아낸 느낌인데…………..정말 고맙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분들이………이 모든게 꿈만 같습니다. 저에게는 상상도 못할일입니다. 그저 고맙다는 말이외에는 다른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글을 남겨주신분들에게 일일이 댓글을 남겨드리고 싶지만 며칠 몇밤을 새워도 못할것 같아서
이글로 대신합니다. 많은분들에게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께서 해주신 격려의 말씀 반드시 인쇄해서 벽에 걸어놓고 두고두고
읽어볼겁니다. 제게는 너무나도 힘이되고 가치있고 소중한 글입니다.

 

그리고 소설이다…부터 시작해서 몇몇분들이 의심하는 댓글을 읽을때는 많이 속상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맞다, 아니다의 논쟁도 있고  저에게 좋은 말씀을 남겨주신분들에게까지 욕설을 하는것에는 솔직히 분노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분들이 이해가 되기도 합니다. 드디어 사랑하는 동생들과 내가 힘을 합쳐 일군 우리집으로 다음주 일요일에
이사를 간다는것 자체가 기뻤고 흥분해서 감정적으로 글을 쓰다보니 사실관계를 자세히 쓰지 않아서 분명 의심할수도 있었을겁니다.
또한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정면, 측면에서 보는것이 서로 다르듯이 일반적으로 자신이 경험하고 이해한폭에 근거해서 말을하기
마련이므로 제 입장이 되어서 살아보지 않는한은 이해하기가 어려울수도 있겠구나…..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욕을 하는것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어느분의 리플중에 “인증샷”을 올리면 해결된다는
말이 있는데 처음엔 그게 무슨말인가 싶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컴퓨터에 올리는 방법을 모르거든요. 카메라
빌려서 오랜 씨름 끝에 겨우겨우 올리는방법을 알았습니다. 여기서 결국 중졸티가 나는것 같습니다.^^

 

사진을 올리긴 했는데 제대로 올렸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쨌건 집을 사게 해준 통장들인데 세어보니 70 여개 되는것 같습니다. 아마 모두 모았다면 백개도 더 넘었을텐데 이사할 때 초창기 통장들은 잊어버렸습니다.

 

지금은 없어진 상업은행 통장도 있고 개설일자를 보니 91년도에 만들었더군요. 농협의 VIP통장도 있는데 상업은행통장과 농협의 VIP 통장을 보니 눈물이 나기도 합니다.

 


업은행 있는 건물에 보통의 예식장이 있었고 잡일등을 맡아서 했었는데 일하시는분들이 정말 많은 도움을 주셨고 많은사람들의 결혼식을
보면서 부러워하기도 했고 몸은 가난했지만 마음만은 따뜻했기 때문이어서 상업은행통장이 반가웠고 몇년전 농협의 VIP통장은 무담보로
2000만원을 즉석에서 대출할수 있는 특혜도 있던 통장인데 통장만으로도 내가 많이 성장했다는게 느껴지기도 하고 슬프기도하고
기쁘기도 하고 기분이 참으로 묘합니다.

 

제가 IMF 시절에 구입했던 등기권리증입니다. 소유주와 등기할 때의 법무사사무소, 그리고 법원의 직인도 일부 가렸습니다.

 

네, 맞습니다. 열다섯살짜리가 당시 할수 있는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시 단순 노동의 부품조립하는 중소기업 공장에 들어갔는데 한달 월급이 20만원(나이가 어려서)이었던걸로 기억하고 있고 새벽에는
두시간동안 신문배달도 했습니다. 그동안 많은일들을 하면서 고생한것을 글로 쓰려면……너무 어렵습니다.

 


쨌건 신문배달을 마치고 난후엔 반드시 돌리다 남은 신문 한부씩을 가져와서 읽곤 했는데 재산을 모으는 방법에 대한 기사중에 많이
강조했던것이 가장 먼저 “종자돈을 모아야 한다”라는 말이었고 처음 목표는 백만원, 그 돈이 모아지면 오백만원, 다시
천만원…….이런식으로 목표를 정해서 모아 갔는데 십만원씩 모을때는 천만원이 언제 모아지나….했는데 천만원이 모아진
통장을 보니 “그까짓 일억쯤이야~~” 하면서 간댕이가 부어도 너무 부은것 같은 자신감이 들었습니다.

 

동생들에게 부업을 시킨것은 공장 지하창고에서 마음씨 좋은 주인 할머니집 반지하원룸으로
이사 갔을때 그 주인할머니가 부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인형의 눈이나, 코 붙이고 이런걸 하면 한달에 9만원정도 받기도 하였고
마늘도 까고, 봉투도 접고….부업양을 많이 할때는 한달에 20만원도 벌때도 있었습니다.

 

동생들 폐품줍게 한것에 대해 눈살을 찌푸리신분들은 아마 “폐품”이라는 단어 때문에
그런것 같은데요. 동생들이 학교 다녀오면서 빈병을 줍기도 하고 새벽에 운동하러 나갈 때 동네한바퀴를 돌면 못같은 철제물, 버려진
책등을 함께 주워오고 당시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니 종량제 같은게 없었을때니까…..그걸 모으는데로 바로바로 팔아서 저금했습니다.

 

속담중에 “티끌 모아 태산”이란게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 그말이 단순한 속담이 아니고 제 심장에 새겨넣을만한 가장 위대한 “재테크의 좌우명”이라고 여깁니다.

 


에서도 말했지만 주말에는 예식장에서 이것저것 잡다한 허드렛일을 했는데 예식장에서 일할때가 가장 신나고 좋았습니다. 뷔페에서
나오는 음식이나,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등을 제 형편을 아는 일하는 아주머니들께서 싸주시기도 하고 동생들도 식당에서 설거지등을
돕고 난후에는 정말 배부르게 음식을 먹일수 있었으니까요.

 

맞습니다. 학력은 중졸이고 나이는 어리고, 저를 처음 고용하시려는 분들은 굉장히
난감해하셨지만 한두달 지나고 나면 오히려 그것이 저의 자랑이 되어서 어떻게든 많은분들이 도움을 주시려고 했습니다. 저는
정말이지……열심히, 온 힘과 정성을 다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또한 처음 몇 년간은 많은 돈도 모으지 못했고 힘들었는데 둘째 동생이 야간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했는데 두명이서 월급을 받으니 그때부터는 사정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저도 경력이 쌓이면서 월급도 올라갔고요.

 

특히 부업이건, 빈병을 줍건간에 돈이 생기면 그날 그날 바로 은행에 가서 입금을
했습니다. 사진 보시면 유난히 새마을금고 통장이 많다는걸 아실겁니다. 그곳의 직원분이 처음에는 저희들을 이상하게 생각했다가
나중에 사연을 듣고 난후부터 비과세로 적금 넣는방법, 목돈을 정기예탁하는법등을 알려주시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

 

8천만원을 어떻게 모았는지 말도 안된다고 하시지만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이야 이율이 굉장이 낮아서 적금을 넣어도 큰 돈을 모으지 못하지만 90년 중반만 해도 3년짜리 적금의 이율이 14% 했었습니다.

 

50
만원을 3년불입하면 이자포함해서 2170만원 가량 받았고 한때 그걸 세 개 동시에 넣었던적도 있었는데 비과세로 해서 3년후에
6500만원정도 되었습니다. 모아진 목돈을 1-2년짜리등으로 정기예탁하면 또다시 이자가 붙고, 천만원단위가 넘어가니까 거짓말처럼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습니다.

 

한달에 천만원을 번다고 해도 천십만원을 써버리면 한달 십만원 적자이고 한달에 백만원을 번다고 해도 아끼고 아껴서 구십만원을 쓰면 십만원은 저축할수 있습니다.

 

저축은 마음먹기에 달려있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더 큰 돈도 모을수 있습니다.

 

물론 동생들이 중간에 큰병을 앓았거나 제가 게으름을 피웠거나 욕심을 부려 엉뚱한곳에 돈을 쓰거나 했다면 절대 모을수 없었을겁니다.

 

그리고 중졸치고 맞춤법이 틀린게 없어서 소설이다..라고 하신분도 계시는데 조금 웃었습니다. 만약 대학 나왔는데도 맞춤법이 틀렸다면 그분들은 대학나온사람에게 “중졸”이라고 말할분들 같아서요.

 

글을 잘쓴다는 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저 살아온 이야기를 썼을뿐이고
맞춤법이 틀린게 없다면 그건 열다섯살때부터 신문배달하면서 거의 매일처럼 신문을 읽어와서 그런것이라 생각합니다. 굳이 신문사까지
밝히라는 분도 계실것 같아서 말씀드리면 한국일보를 봤고 장명수 칼럼등을 정말 좋아했고 동생들에게 좋은기사들은 읽어주곤 했습니다.

 

다가구 주택 구입은 이렇습니다.

당시 매매가 3억원짜리 주택이었고 반지하를 1층으로 여겼을때 4층 건물의 12가구가
입주해있는 총 전세보증금이 2억2000만원의 주택이었습니다. 제가 그집을 사면서 큰 실수를 했던건 모아 놓은 8천만원을 몽땅
털어 넣고 수중에는 돈이 없이 집을 산것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역전세대란이 일어나서 큰 고통을 받았었습니다.

 

당시 세금 700만원은 어쩔수 없이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새마을금고에서 대출)
충당했고 도시가스를 놓을때는 한번 대출을 받으면 다시 대출을 못받는줄 알고서 세입자들에게 부탁을 한것이었고 신혼부부의 도움과
마을 금고에서 추가대출을 받을수 있다고 해서 대출받은돈을 합쳐서 도시가스를 놓았습니다.

 

그리고 세입자인 신혼부부가 어떻게 집주인에게 돈을 빌려줄수 있느냐고 하신분도 계셨는데……..빌려주신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당시 도시가스 놓으면서 세입자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사를 가야 한다고 하시는데 죄송하게도 지금은 제가 돈을 빼줄 형편이
못됩니다. 그런데 부동산에서 말하기를 우리집은 구조도 좋고 가격도 저렴한데 기름 보일러라서 안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도시가스를 놓으려고 하는데 여러분들과 제가 힘을 합칠수밖에 없습니다.

 


룸은 백만원, 원룸은 오십만원을 부담하고 나머지는 제가 충당하겠습니다. 여러분중에 돈이 부족하면 형편대는데로 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그 돈은 결코 없어지는돈이 아닙니다. 201호가 1800만원 전세인데 백만원을 내시면 1900만원으로 전세보증금을
고쳐드립니다. 그러니 세입자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세입자들은 거의 모두 거절을 하셨고 때론 모욕을 주기도 했고 다만…주인세대에 거주하는 신혼부부와 친청 어머니란 분이 총 5백만원을 도와주시고 그래서 그 집은 기존 2500만원 전세를 3000만원으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보통 다가구주택엔 주인세대가 따로 있습니다.

주인이 입주해서 관리하면서 살지만 집주인이 그럴 형편이 못되면 임대를 하게 되고, 그렇지만 편의상 주인세대라고 호칭합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너무나도 고마운 그 신혼부부는 301호에 거주하는 세입자였습니다.

 

사실 지금이야 임대차보호법이니, 전세와 월세에 따른 집주인의 의무니, 세입자의 권리니 하는것등은 정확히 알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경황도 없었고 경험도 없었을뿐아니라 처음 부딪히는일이라 시행착오도 많았습니다.

 

그리고 전세를 월세로 바꾸면서 내준 보증금은 어디서 났느냐…..(꼭 청문회 하는것 같습니다.^^)

 

당시 도시가스 놓으면서 3천만원으로 했던 주인세대의 전세가 현재 9천만원입니다. 투룸과
원룸도 거의 당시보다 2.5배 정도 올랐습니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집주인에게 유리한 전세대란이 두세번정도 났고 짝수년도에
난것 같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투룸의 경우 그때는
2000만원 전세였는데 지금은 2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0만원을 놓을수 있습니다. 또한 저는 당시 전세보증금 2억2천만원을
모을때까지 더욱더 돈을 모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을 구입하고 난후에도 여전히 반지하에 살면서 돈을 모았기 때문에 일부 보증금을
빼주더라도 월세가 가능했습니다.

 

지금은 총 보증금이 16000만원입니다.  보통 다른집에 그 정도 보증금이면 월세가
400만원 이상씩 나온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월 200만원 가량 받는데 물론 그것도 큰돈이지만 월세가 주변보다 적은 이유는
평균시세보다 훨씬 싸게 놓기 때문입니다.

 

도시가스 놓을때 신혼부부 친정어머니께서 “집주인 피눈물빼고 들어온”것이라면서 돈을 내주셨지요. 그건 저를 위로하는말임과 동시에 저에게 경고 하는말이기도 한다는걸 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세입자들 피눈물빼면서”까지 돈벌면 안된다는….그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집에 사시는 세입자분들에 대해서 자세히 말하고 싶지만 혹여 저의글로 인해
불편해하거나 상처를 받으실까봐 올리지는 못합니다. 솔직히 지난번 올린글도 조심스럽습니다. 첫 댓글에도 남겼다시피 저의글이 결코
세입자분들에게 상처가 안되었으면 합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를 괴롭혔던 그 분들때문에 더욱 자신을 채찍질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다만, 현재 살고 있는 이분들도 어쩔수 없이 월세를 살고 있긴 하지만 어차피 제 목표는
집 예쁘게 지어서 동생들과 행복하게 사는것이 꿈이므로 집값좀 올랐다고 개구리 올챙이시절 생각못하고 집주인으로 위세를 부리거나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습니다.

 

저는 12월이면 이상하리만치 너무나 외롭고 슬펐습니다. 집이 없다는것 때문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매년 12월이면 용기잃지 말고 힘내라는 편지를 일일이 써서 세입자분들에게 전달을 하고 작지만 마음에
담은 선물을 드리곤 했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사실 비단이 곱네, 말이곱네 해도 말처럼 보드랍고 고운것이
어디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고마움의 마음을 전달했을뿐인데 그보다 더 많은것을 받곤했습니다.

 


금 살고 있는 그분들은 하나같이 선량하고 좋으신분들이십니다. 어떤 세입자분은 아파트 공사자등에서 미장일을 하시는데 여름을 앞두고
우리집 외부의 바닥을 방수시멘트로 보수해놓으셔서 깜짝 놀랬습니다. 단지 그분은 저에게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이 이것밖에
없으시다면서 해주셨는데 정말이지….. 그때도 거친 그분의 손을 잡고 눈시울을 적셨던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일때문에, 주변의 다른 집주인들로부터는 제가 혼나기도 하고 욕도 먹고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뜻을 굽히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습니다.

 

어떤분이 댓글로도 남겨주셨지만 이 세상에는 저보다 더 어렵게 자란분도 계시고 당장 여러분들의 부모님 이야기만 들어도 그게 사실이었을까? 할 정도의 고생을 하시는분들도 있을겁니다.

 

아울러 현재 어려움에 처해있거나 하는분들에게 저의 글이 힘이 되어주고 티끌만한 용기라도 주어질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어느 지하철역 화장실에 이런 문구가 있었습니다.

 

‘세상을 보는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아무것도 기적으로 보지 않는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기적으로 보는것이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것도 기적이고, 진정한 우리집으로 이사를 가는것도, 신혼부부를
만난것도,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이토록 많은 찬사와 격려를 듣는것도 모두가 기적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전보다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정말 고맙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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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분과 지금 나의 생활이 뒤바뀌었다고 했을때, 나는 이 분처럼 이렇게 열심히 살 수 있었을까..

 출처 : 다음 아고라 광장, 빈배

우물안 개구리

기분좋은 이야기긴 하지만 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KLDP에 실제로 참여하여 문서를 번역하거나 창작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이라면 linuxdoc sgml,
docbook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linuxdoc sgml은 LDP(Linux
Documentation Project)에서 특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txt, html, ps 등의 포맷으로 문서를
제작하기 위해 새롭게 정의한 DTD의 일종입니다. HTML과 비슷한 형태로 소스를 한번 만들어 두면 sgmltool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위에 말씀드린 여러가지 포맷의 문서들을 자동으로 생성해 주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한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와,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따로 정의된 태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최준호씨가 일본 사람의 패치를 참고하여
한글처리 부분을 수정하고 번역자를 명시할 수 있는 태그를 추가하여 몇년째 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linuxdoc
sgml DTD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LDP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것으로서(물론 이것도 어느 DTD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긴
합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최근에는 DocBook라는 포맷으로 전환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DocBook은
linuxdoc 보다는 좀더 “일반적” 입니다. 컴퓨터/기술 문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많은 태그들이 세세하게 정의되어
있지요. 태그가 많은 만큼 기능도 많지만 그에 따라서 처음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더 걸립니다.

그런데 이 DocBook에서도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특별히 정의된 태그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박용주님이 http://docs.kldp.org
를 만들면서 DocBook의 스타일시트를 조금 고쳐서 특정 태그를 번역자를 위한 태그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쳤으며 그 외 다른
내용들 역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지요. 그리고 이를 kldp.dsl이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에서 배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KLDP는 애초에 하우투 문서들을 번역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졌지요. 그리고 지금껏….가장 기본적인 문서
변환 작업에 사용하는 표준 포맷에 가장 기본적으로 명시가 되어야 할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아직 없다는 사실 때문에
linuxdoc sgml DTD도 따로 만들고 DocBook 스타일시트도 따로 만들게 된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정도로 작업을 하는 곳은 별로 없거든요. 대부분 원본의 원 저자 이름 옆에 번역자의 이름을 나란히 넣어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부분에 그냥 대충 추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KLDP도 그런 식으로 작업이 된 경우가 종종 있구요.

그러다 그저께였나…DocBook으로의 전환을 위해 http://docs.kldp.org
에서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여러가지를 의논하던 중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정말로 없는 것일까(DocBook에는 태그가 아주
많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도 알고 싶어서 LDP의 메일링 리스트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몇년째
이렇게 따로 태그까지 추가해 가면서 작업을 하다가 거의 처음으로 KLDP 작업에 대해 직접 메일을 보내본 겁니다.

“우리는 너네들 HOWTO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참여율이 매우 높다. 그런데 번역자를 명시하는 방법이 없어서 우리가 따로 작업을 해 왔는데 혹시 DocBook에서는 그런 방법이 없느냐? 만약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한국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취지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틀도 되지 않아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LDP에는 Author Guid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인데 이곳에 번역자를 위한 섹션이 추가되기로 했고 이미 베타 샘플까지 나왔습니다. 이틀 사이에!
-DocBook에도 역시 번역자를 위한 태그를 DocBook에 정식으로 넣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에 작업하던 linuxdoc sgml의 DTD에 최준호씨가 번역자를 위해 따로 추가한 , 태그를 linuxdoc sgml
DTD를 개정하여 정식으로 추가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패치를 처음 만들었던 일본 사람에게까지 이미 연락이 되었지요.

제가 평소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궁금증, 그것도 KLDP를 몇년째 운영하면서 그냥 머리속에서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필요성을 실제로 풀어놓자 너무도 빨리 실현이 되어 버린 겁니다. 몇년동안의 궁금증과 바램(?)이 단 이틀만에 풀려버린 거지요.
참으로 기쁜 일이긴 하지만 일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 진작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동네(?) 사람들은 좀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
자기가 발견한 문제점들은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알려주기 전에는 개발자가 미리 알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바로바로
알려주고, 자기가 할수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을 들여서 개발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전혀 어려운게 아니죠. 그러한 관심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흥미거리인 것이고 이동네(?)가 굴러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저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다 어렴풋하게 생각을 담아두지 마시고 바로바로 표현을 하십시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는 경우를 분명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멀리서 찾으실 필요도 없이 가까운 곳을 둘러보아도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프로젝트는 수도없이 많습니다. 단순한
사용자에서, 남에게 도움도 되고 스스로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다는 얘깁니다.

부디 자신의 관심과 흥미가 끌리는 곳에 참여하시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해주십시오.
그러다 보면 저처럼 이렇게 감동하는 날도 언젠가 분명히 올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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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kldp.org/node/67328

고승덕 변호사..

고 승 덕 변호사

[ 도 입 ]

ㅇ 나는 외모에 컴플렉스가 있다. 아시겠지만, 대학교 때 고시 3개를 합격했다. 사법고시 합격, 외무고시 2등, 행정고시 1등, 그리고 서울대 법대를 수석 졸업했다. 학교 졸업 후 부모님께 큰 절을 했었다. 똑똑한 머리를 물려줘서가 아니라, 사실은 변변찮은 외모덕에 그저 고시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 줬기 때문에 감사하다는 의미로.

[ 본 론 ]

ㅇ 내 직업은 ① 변호사이면서, ② 방송도 하고, 3년 전부터 ③ 책을 쓰고 있다. 평생 소원이 1년에 1권씩 평생 책을 내는 것이다. ④ 글도 쓴다. 모 신문사에 경제기사를 1주일에 2개정도 쓴다. ⑤ 또 오늘과 같은 특강도 한다. 평균 1주일에 2회 정도. ⑥ 증권분야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운영하고 있는 사이트가 있는데 회원수만도 3만 5천명 정도 된다. 나름대로 홈페이지 관련 사업을 하나 구상중인 것도 있다. ⑦ 마지막으로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처럼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척 많은 것 같고 어떻게 이걸 다 할까 생각이 들겠지만 다 가능하다. 이 중에서 한가지만 하더라도 힘들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가능하다고 생각하면 다 가능하다.

ㅇ 무엇이든지 목표가 중요하며, 그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신이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일수록 확신을 갖지 못한다.

ㅇ 사람들은 나의 삶을 보면서 머리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다 노력의 결과다.

ㅇ 학교 다닐 때 누구나 학원도 다니고 과외도 해 봤을 것이다. 고 2때 수학 45점의 낙제점수를 받은 적이 있다. 그 때 대학을 못 간다는 선생님의 말이 나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집안이 그리 넉넉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외를 한다는 것은 생각 할 수 없었다. 그래서 6개월간 죽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해 9월 2학기 때 400점 만점에 400점을 받았다. 그 이후로 매 시험마다 1등 했고, 석달에 한 번 정도 2등을 했었다. 학생시절 나는 여러 차례 내가 결코 남들보다 머리가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고,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남만큼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ㅇ 인생에 있어 2가지 자세가 있다.
보통 사람들은 남보다 적게 노력하고 결과는 남들과 같은 똑같이 나오게 하려고 한다. 사실은 이것이 경제학 법칙에 맞는 것이다. 투입을 적게하고 효과를 많이 내는 것.
반대로, 다른 사람들 만큼의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경험상으로 보면 후자가 훨씬 좋은 결과를 낳는다.
남보다 노력을 더 많이 해서 비슷한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 이것은 어느 시점이 지나면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살면서 내 스스로 내린 결론이다.

ㅇ 그럼 노력이란 무엇이냐? 나는 “노력이란 성공의 확률을 높이는 것이다” 라고 정의 내린다. 하지만 물론 결과를 반드시 보장하지는 않는다. 노력에도 함수 관계가 성립한다.
* 노력 = f(시간 × 집중)
내가 실제 노력을 했는가 안 했는가를 판단하려면 시간을 많이 투입했거나 집중을 잘 했는가를 살펴보면 된다.

ㅇ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3시간만에 끝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5시간만에 끝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3시간만에 끝내는 사람이 실제 일을 더 잘하는 것 같지만 나머지 2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중요하다. 더 많이 알기 위해 그 2시간을 투자하지 않았다면 노력하지 않은 것이다.

ㅇ 집중에 대해서 얘기해 보면, 고시 공부할 때 예를 들어 보겠다.
나는 고시 공부를 1년간 해서 합격했다. 어떻게 가능 했느냐? 첫째는 된다고 생각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보통 고시에 합격하려면, 봐야 할 책이 50권, 권당 페이지는 500P, 그 책을 5번을 봐야 합격하다는 얘기가 있다. 그러나 나는 7번을 보았다. 이를 계산해 보면
50 × 500 × 7 = 175,000 페이지를 읽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것을 1년을 360일로 계산해보면 1일 목표량이 나온다. 즉, 1일 500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봐야 한다는 계산이다.

ㅇ 이처럼, 목표를 세울 때는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막연한 목표는 달성하기 힘들다.
이 결론을 보면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라고 생각할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들은 포기하게 된다. 설사 하게 되더라도 하다가 흐지부지 된다. 이렇게 목표에 대해 확신이 없고, 목표를 의심하는 사람은 집중을 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목표에 확신을 가져라.

ㅇ 된다는 사람만 되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된다. 일단 안 된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85%의 사람들은 이미 나의 경쟁상대가 아닌 것이다. 된다고 생각하는 일부만 나의 경쟁이 된다. 그럼 경쟁대상이 줄어드니 훨씬 마음도 한결 가벼워 진다.

ㅇ 세상도 절대적으로 잘 하는 사람은 원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남 보다만 잘 하면 된다. 그럼, 다른 사람보다 잘 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그것은 나 자신을 판단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인간은 거의 비슷하다. 내가 하고 싶은 선에서 멈추면 남들도 그 선에서 멈춘다. 남들보다 약간의 괴로움이 추가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노력이란 것을 했다고 할 수 있다.

ㅇ 고시 공부할 때 7시간 잤다. 장기간 공부를 해야 할 경우라면 일단 잠은 충분히 자야 한다. 하루 24시간 중 나머지 17시간이 중요하다. 고시생의 평균 1일 공부시간은 10시간 정도다. 그러나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잠자는 시간 빼고 17시간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정말,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남들과 똑같이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반찬 떠 먹는 시간도 아까웠다. 씹는 시간도 아까웠다. 그래서 모든 반찬을 밥알 크기로 으깨어 밥과 비벼 최대한의 씹는 시간도 아꼈다. 숟가락을 놓는 그 순간부터 공부는 항상 계속 되어야 했다. 나의 경쟁자가 설마 이렇게까지 하겠냐 하고 생각들면 노력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ㅇ 미국에서 생활 할 때 보면 소위 미국의 전문가라고 하는 사람들은 간단한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운다. 점심시간 1시간 다 쓰고, 이래저래 20~30분 또 그냥 보내는 우리 나라 사람들은 그들에 비하면 일 하는게 아니다.

ㅇ 집중을 잘 하는 것은 벼락치기 하는 것이다. 벼락치기 할 때가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고 한다. 우등생은 평소에 벼락치기 하는 마음으로 공부를 한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막연한 목표를 가지면 이렇게 긴장이 안되지만 분명하면 항상 긴장되고 집중을 잘 할 수 있다.

ㅇ 방송하면서 인생이 많이 바뀌었다. 처음 주변 사람들은 말렸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 사람이 해야 할 일이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면 해도
되는 일이다 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해야 할 일이 참 많다.

ㅇ 나에게는 인생 철학이 있다. 인생을 살다 보면 A와 B가 있을 때 나는 A가 더 중요하지만 B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많다. 그럴 때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학교 다닐 때 나는 A는 여자친구 였고, B는 고시 합격 이었다. 대학시절 한 때 A는 내게 무척 중요한 시기가 있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t1,t2판단법이란게 중요하다. 내가 A를 선택하면 난 B를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줄어든다. 그러나, 나의 외모 컴플렉스 때문에 A를 성공하는 일 또한 확신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B를 먼저 해서 좀 더 유리한 조건이 되면 A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고시합격을 더 빨리 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집중도 잘 되었다.
이것이 내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느낀 것이다. 장기간 동안 시간의 흐름을 계산해 볼 때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ㅇ 그래서 난 남들이 말려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코미디 프로에도 나갈 수 있었다. 난 ” 할 수 있을 때 뭐든지 해 버리자 ” 라는 생각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 그러면서 인생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쌓아 가면 된다. 하다가 안되면 포기하더라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아예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ㅇ 나의 징크스는 시험에 합격하려면 10번을 봐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합격의 확신을 갖는다. 3~4번만 보면 불안하다. 그래서 그냥 뭐든지 기본적으로 10번을 본다. 몇 번 3~4번 책을 보고 시험을 본 적 있다. 역시 떨어졌다.

[ 결 론 ]

ㅇ 앞으로는 이렇게 해 보자. 첫째는 남보다 많이 노력하는 것이다. 둘째는 어려운 목표일수록 확신을 가져 보자. 그러면 정말 되는 일이 훨씬 많다. 셋째는 남보다 최소 3배는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ㅇ 직장에서 윗 사람이 일을 시킬 때 남보다 더 많은 일을 시키고, 나한테만 어려운 일을 시키더라도 신나는 표정을 지어보자. 대부분의 사람, 아니 나의 경쟁자는 이럴 때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이기려면 그들 보다는 다른 모습이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괴로움을 추가해 보자.

ㅇ 남들에 비해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3배의 노력만 한다면 4번째 부터는 분명 가속도가 붙어 급속도로 차이가 날 것이다.

ㅇ 마지막으로 대인관계에 대해 강조하고 싶다. 세상을 살다보면 대인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노력이다. 성공을 위해서는 나 혼자의 노력 외에 대인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경우가 있다. 어떤 상대를 만나든 최소 5분은 상대방을 위해 생각하는 시간으로 할애해 보자.

ㅇ 남과 똑같이 해서는 절대 노력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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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엇을 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