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좋은 위치!!

 너의 위치에 감사하십시요!!

 차가운 위치!!

 당신의 훌륭한 위치는…

 얼마전부터.. 위의 글과 같은 알수없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무엇을 뜻하는지…알아보기도 힘들다.

 광고인것 같은데…문제는 광고를 보는 사람이 무슨 광고인지 모르겠다는 것…

 한동안 계속 수작업으로 댓글들을 삭제 하였다..

 하지만 하룻만에 250여개의 댓글들이 달리는 것을 보고…살포시 ‘손님들의 댓글 작성’ 권한을 삭제하였다.

 이로써 좀 잠잠해졌으면 한다…

KLDP Conf 2008/03/08

 KLDPConf 를 소개합니다.

 

 KLDPConfOpenSource를 주제로 자발적인 참여를 권장하는 소규모 세미나입니다. 열린 환경에서 서로 공유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심도 있는 토론과 상호 교류, 데모 등을 위해 발표 시간만큼의 자유 시간을 확보하여 모두가 함께 OpenSource를 즐기고, 배우고, 느낄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앞으로 KLDPConf는 기존의 세미나 위주에서 벗어나 참석자들간의 참여와 교류를 권장하는 방향으로 진행하고, CodeFest는 좀더 실질적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 일시: 2008 3월 8일(토) 16:00 ~ 21:00 (음료 및 식사가 제공됩니다.)
  • 장소: [http]토즈 강남대로점 (주의: 토즈 강남점이 아니라 교보문고 옆에 있는 강남대로점입니다.)
  • 발표를 위한 빔 프로젝터가 제공됩니다. 노트북은 필요시 각자 가지고 오세요.
  • 행사 장소에서 무선랜이 제공됩니다.

 모두들 함께 해요. : )

 참가 신청 : http://wiki.kldp.org/wiki.php/KLDPConf/20080308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늙은 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

이 글을 보니 제가 고등학교때가 생각이 나네요.

제가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저도 한말씀 올리겠습니다.

저는 71년 돼지띠 90학번입니다. 어디에서 보니 인구가 가장 많은 순으로

71, 72, 70 이렇게 되더군요.. 덕분에 군대에도 6개월씩 기다려서 가고 그랬고,

아마 대학 경쟁률도 당시 사상 최대였을듯 합니다.

님은 아마도 19세 정도 되셨고, 저는 한국나이로 38세이고, 만으로 36세이니

거의 20년정도 차이가 나네요.

저는 그렇게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한 편이었습니다.

성격도 내성적이고 사회성이 무척 떨어지는 반면, 집에서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

중,고등학교 시절은 제 인생의 암흑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저희 누나는 경북대학교 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어머니도 의대나 치대에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적을 봐도 거기에 갈 형편은 안되고, 제 적성 또한

그런 곳에는 맞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컴퓨터가 너무 좋아서 사실 고3년동안 공부보다는 울티마 같은 게임을

독서실에서 설계하곤 했습니다.

여차저차해서 성적에 맞게 경북대학교 유전공학과에 합격했고,
(반에서 전기 합격한 친구는 딱 2명이었고, 그중에 한명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재수하라고 하시더군요. (결론은 다시 공부해서 의대가라는 거죠..)

친구들은 다음해에 모두 의대, 치대, 한의대..등등에 들어가더군요.

저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어머니 뜻에 반해 집에서 미친사람 처럼 하루 반항하다가

결국 그냥 학교에 다녔습니다.

대학은 그냥 간판만 딴다고 생각하고, 대학 내내 컴퓨터와 살았고,

너무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군대에 다닐때는 아케이드용 게임을 만드다고

군대에 설계도를 가지고 다니기도 했고, 휴가 때는 서울 회사에 들락거리면서

게임을 만들었습니다.

군대 끝나고는 2년동안 서울을 모 회사에서 게임도 만들었습니다.

몸이 아파 복학을 하고, 대학교 4학년이 되니 걱정이 되더군요.

학점은 바닥이고, 취직은 전공으로 불가능하고(성적…),

그래서 그 당시 LG 소프트에 경력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SI 뭔지 이 산업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말 그대로

풋내기였지만, 그냥 일을 잘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냥 취직을 하는 것보다는 관련 공학을

더 공부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일 것 같아,

생애 처음으로 4학년 1학기때 전산학 관련 책을 싸들고 도서관에 다녔습니다.

전산관련 수업 1시간도 듣지 않고, 그해 전산 대학원에 합격하고,

2년동안 DBMS를 전공하였지요.

대학원에 다니면서 제가 느낀게 어떻게 4년 전산을 전공한 사람들이

이렇게 나보다 모를까? 하는 점이었습니다.

자랑이 아니고, 뭔가 좋아서 하는 것하고, 그냥 취직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지요.

교수님께서는 박사를 하라고 강력하게 원하셨지만, 집안 형편상 KT관련 회사에

취직을 하였다가 1년만에 그만두고 지금 MMDB를 만들고 있는 회사에서 창업멤버로

8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제 인생의 황금기라고 한다면, 대학 4학년 동안 컴퓨터에 미치게 산것과,

군대 마치고 2년간 서울에서 미치도록 게임개발한 것과

알티베이스에서 지난 7년동안 미친듯이 DBMS를 개발한 것입니다.

물론 재수를 해서 의대에 갔으면, 지금쯤 어딘가에서 돈 걱정없이 살 수 있었을 것이고,

개업해서 망했을 수고 있겠지요.

알티베이스는 이제 겨우 100명에 백 몇십억을 하는 회사지만,

그 어디보다도 가치있는 기술력 있는 회사라고 믿고, 자랑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제 인생을 투자한 곳이고, 좋아서 그렇게 해서 그렇지요.

알티베이스가 아니라 이 회사가 청소를 하는 회사라고 했더라도

저는 이곳에서 미친듯이 바꾸고 일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가진 한가지 모토가 있다면,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알아서 온다” 입니다.

세상에 안정적인 직장이 어디있습니까?

그렇게 안정적인 직장이 있다 한들, 교통사고 나서 죽으면 끝 아닌가요?

물론 저도 때로는 불안하고, 은행 잔고가 걱정도 되고, 나이 40이후가 걱정됩니다.

하지만, 안전 펜스 속에서 인생을 관조하듯이 살면, 죽을 때 즐거울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마치 선진국처럼 치열한 경쟁사회이면서도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대한민국이 참 어이없는 나라라고 생각을 하지만,

그게 나의 직업을 “공무원” 과 같은 철밥통을 선택하는 결정적 이유가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님은 이제 스무살이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하지 않나요?

의대에 가신다면 더 이상의 조언은 불필요할 듯 하고,

IT를 하신다면 제가 하지 못했던 다음과 같은 조언을 드립니다.

가능하다면 한국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셔서 대학생활동안 우수한

친구들과 IT 분야에서 경쟁하시고, 공부 열심히 하십시요.

대학원은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 가셔서 공부를 하시고,

그들과 경쟁할 수 있는 장점을 터득하십시요.

그리고, 영어는 외국인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 까지 습득하십시요.

선진 IT회사에 들어가셔서 그들의 개발 문화, 습성, 아이디어를 배우세요.

자신이 잘 익은 열매라고 생각되시면, 과감하게 IT분야에서 창업을 하시고,

성공하십시요.

그리고, 한국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세계적으로 성공한 소프트웨어 기업을

만들었는지 모범을 보이시고, 이후의 젊은이들이 님을 따라 길을 갈 수 있도록

인생의 선배가 되어 주십시요.

제가 이렇게 되고 싶으나, 저는 너무 많이 왔네요. 하지만, 오늘도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늙은 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

꿈을 위해 인생을 투자하시고, 성공한 이후에 그 추억으로 인생을 반추하는 멋진

사람이 되시길.

고도의 추상화, 극도의 구체화, 에디슨을 그리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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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는 꿈을 먹고 살고, 늙은 이는 추억을 먹고 산다”


출처 : http://kldp.org/node/90344#comment-426697

우물안 개구리

기분좋은 이야기긴 하지만 일면,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혹시 KLDP에 실제로 참여하여 문서를 번역하거나 창작 원고를 보내주신 분들이라면 linuxdoc sgml,
docbook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애초에 linuxdoc sgml은 LDP(Linux
Documentation Project)에서 특정 프로그램에 종속되어 있지 않은 txt, html, ps 등의 포맷으로 문서를
제작하기 위해 새롭게 정의한 DTD의 일종입니다. HTML과 비슷한 형태로 소스를 한번 만들어 두면 sgmltools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위에 말씀드린 여러가지 포맷의 문서들을 자동으로 생성해 주지요. 그런데 이게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한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와,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따로 정의된 태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최준호씨가 일본 사람의 패치를 참고하여
한글처리 부분을 수정하고 번역자를 명시할 수 있는 태그를 추가하여 몇년째 잘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linuxdoc
sgml DTD는 이름에서 알수 있듯이 LDP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낸 것으로서(물론 이것도 어느 DTD를 참고해서 만든 것이긴
합니다.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네요.) 최근에는 DocBook라는 포맷으로 전환 작업이 진행 중입니다. DocBook은
linuxdoc 보다는 좀더 “일반적” 입니다. 컴퓨터/기술 문서를 작성하는데 필요한 많은 태그들이 세세하게 정의되어
있지요. 태그가 많은 만큼 기능도 많지만 그에 따라서 처음에 익숙해지는데 시간이 좀더 걸립니다.

그런데 이 DocBook에서도 번역자를 명시하기 위해 특별히 정의된 태그가 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박용주님이 http://docs.kldp.org
를 만들면서 DocBook의 스타일시트를 조금 고쳐서 특정 태그를 번역자를 위한 태그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쳤으며 그 외 다른
내용들 역시 약간의 수정을 가하였지요. 그리고 이를 kldp.dsl이라는 이름으로 홈페이지에서 배포를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KLDP는 애초에 하우투 문서들을 번역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 졌지요. 그리고 지금껏….가장 기본적인 문서
변환 작업에 사용하는 표준 포맷에 가장 기본적으로 명시가 되어야 할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아직 없다는 사실 때문에
linuxdoc sgml DTD도 따로 만들고 DocBook 스타일시트도 따로 만들게 된겁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 이정도로 작업을 하는 곳은 별로 없거든요. 대부분 원본의 원 저자 이름 옆에 번역자의 이름을 나란히 넣어 버리거나
아니면 다른 부분에 그냥 대충 추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KLDP도 그런 식으로 작업이 된 경우가 종종 있구요.

그러다 그저께였나…DocBook으로의 전환을 위해 http://docs.kldp.org
에서 메일링 리스트를 통해 여러가지를 의논하던 중 번역자를 위한 태그가 정말로 없는 것일까(DocBook에는 태그가 아주
많습니다.)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처리를 하는지도 알고 싶어서 LDP의 메일링 리스트에 메일을 보냈습니다. 몇년째
이렇게 따로 태그까지 추가해 가면서 작업을 하다가 거의 처음으로 KLDP 작업에 대해 직접 메일을 보내본 겁니다.

“우리는 너네들 HOWTO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데 참여율이 매우 높다. 그런데 번역자를 명시하는 방법이 없어서 우리가 따로 작업을 해 왔는데 혹시 DocBook에서는 그런 방법이 없느냐? 만약 없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한국 말고 다른 나라는 어떻게 하느냐?”

이런 취지의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이틀도 되지 않아 매우 놀라운 일이 벌어졌지요.

-LDP에는 Author Guide라는 것이 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처음 참여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인데 이곳에 번역자를 위한 섹션이 추가되기로 했고 이미 베타 샘플까지 나왔습니다. 이틀 사이에!
-DocBook에도 역시 번역자를 위한 태그를 DocBook에 정식으로 넣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존에 작업하던 linuxdoc sgml의 DTD에 최준호씨가 번역자를 위해 따로 추가한 , 태그를 linuxdoc sgml
DTD를 개정하여 정식으로 추가하기 위한 논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패치를 처음 만들었던 일본 사람에게까지 이미 연락이 되었지요.

제가 평소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해 왔던 궁금증, 그것도 KLDP를 몇년째 운영하면서 그냥 머리속에서만 생각했던 부분에 대한
필요성을 실제로 풀어놓자 너무도 빨리 실현이 되어 버린 겁니다. 몇년동안의 궁금증과 바램(?)이 단 이틀만에 풀려버린 거지요.
참으로 기쁜 일이긴 하지만 일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왜 진작에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이동네(?) 사람들은 좀더 적극적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넓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부분,
자기가 발견한 문제점들은 실제로 경험한 사람이 알려주기 전에는 개발자가 미리 알수가 없습니다. 조그만 것이라도 바로바로
알려주고, 자기가 할수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시간을 들여서 개발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전혀 어려운게 아니죠. 그러한 관심
자체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건강한 흥미거리인 것이고 이동네(?)가 굴러가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저처럼 오랫동안 머릿속에다 어렴풋하게 생각을 담아두지 마시고 바로바로 표현을 하십시오. 생각보다 훨씬 빨리 좋은 방향으로 개선되는 경우를 분명 경험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멀리서 찾으실 필요도 없이 가까운 곳을 둘러보아도 여러분의 손길을 기다리는 프로젝트는 수도없이 많습니다. 단순한
사용자에서, 남에게 도움도 되고 스스로 보람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거듭날수 있는 기회가 널려 있다는 얘깁니다.

부디 자신의 관심과 흥미가 끌리는 곳에 참여하시고…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해주십시오.
그러다 보면 저처럼 이렇게 감동하는 날도 언젠가 분명히 올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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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http://kldp.org/node/67328

가난했던 우리집.. 그리고 엄마..

한참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흐느껴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먼 소리지?’

눈을 비비고 깨어보니 언니 오빠들이 눈물을 훔치며 “아빠~”하고 울고 있었다.

난 어리둥절해하며 왜그러냐며, 왜우냐며 영문도 모른채 따라 울었다.

엄마는 이미 졸도해 있었고 그 옆을 작은아빠가 지키고 계셨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

내나이 9살.. 우리아빠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

장례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 어느날, 반에선 학급비를 걷고있었다.

“쟤는 걷지말자, 아빠도 죽고 가난하자나.”

나만 재외시킨다.

애써 못들은척하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울먹였다.

4학년 여름 미술시간, 엄마들을 초대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 엄마는 못오신다. 돈 벌러 나가야하셨으니까….

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줌마들이 설렁설렁 돌아다니시다 내 등뒤에 서신다.

“어머~ 잘그리네~ ㅎㅎㅎ”

“얘네 엄마가 연대리에 멸치팔러온 아줌마자나~”

“아 그래? 어~ 그렇구나~”

………………. 멸치??……………. 우리 엄마가??………………..

눈물이 고였다.

난 엄마가 멸치를 팔러 다니는지 머하는지 몰랐다.

그냥 일하러 나가는 것만 알았는데..

——–

버스는 왠만하면 안타고 다녔던 우리(작은오빠와 나)..

아니 그돈마저 없어 한시간 거리 학교를 더 일찍 걸어다녔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날..

다른 엄마들은 우산 안가지고간 아이들을 찾아 교문앞에 서성이며 아이들을 맞이해준다.

우린 일찌감치 체념하고 운동화를 가방속에 넣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맘좋은 버스기사 아저씨를 만나 공짜로 얻어타고 가고 있는데

마을 어귀쯤에서 저 넘어로 우리 엄마가 보였다.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우산을 들고 검정장화를 신고 비닐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빠른걸음을 재촉하시던 우리 엄마가 ..

“아저씨 차좀세워주세요”

팡팡팡~~ 작은 손바닥으로 버스를 쳐댔다.

그시간이면 애들 다 끝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란거 알면서

그때 가도 이미 늦었다는걸 알면서

머하러 그 비를 맞으며, 행여나 길 엊갈리면 어쩌려고 그러고 가셨는지..

“엄마~~”

버스에서 내려 달려오는 우릴 보시고 엄마는 놀라하셨다.

나는 너무 좋았다.

우리 엄마도 우리줄 우산을 들고 우리 마중하려 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냥 저냥 마냥 너무 신났다.

“태평리 장에 콩팔러 나갔다 오느라 늦었네~”

변변한 우산조차 없었던 우리집이였기에 콩팔아 우산을 사신거였다.

아직도 그때가 난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끔 이때 생각이 나면 어처구니 없을정도로 눈물이 나온다.

————–

 우리집은 가난했다.  재산이래봤자 시골집과 경운기 한대..

먹고살길이 막막해진 엄마는 우리 4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내나이 12살, 우리 큰오빠가 18살, 울언니 17살, 작은오빠 14살때..

그때 엄마가 시작한 일은 식당 설겆이 일이다.

언니와 큰오빠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낮엔 일을했다.

엄마를 도와야한다고 스스로들 결정을했다.

서울로 전학온 나는 도시락을 자주 못싸와 점심을 참 많이도 굶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나가있고 그랬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며 넌 왜 도시락을 안싸오냐고 막 다그치셨다.

왜이렇게 서럽지? 막 눈물이 났다.

손을숙선생님..내일도 안싸오면 혼날줄 알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 내내 두근대고 떨리는 가슴으로

다음날 점심시간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밥을 좀 굶어서 그렇지 내성격은 언제나 활발했구 명랑했다.

오히려 겉으론 더 씩씩하게 굴어야했다..

이것마저도 아니면 난 너무 불쌍해보일게 분명하니깐,,,

———

성수 2가 3동..

완전 지하 단칸방이 우리 집이였다. 보증금 백만원짜리 월세방.

어느날, 일나간 엄마가 저녁 12시가 넘어도 들어오시질 않았다.

어린맘에 덜컥 겁부터 나고, 머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대문에 쪼그려 앉아 엄마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면서

‘설마 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간건 아니겠지, 설마 누구한테 납치된건 아니겠지,

설마 어디서 죽어있는건 아니겠지..’

가슴의 두근거림을 그 조그만 심장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1시무렵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난 곧장 엄마한테 달려가 안기면서 대성 통곡을 했다. 정말 너무 눈물이 났다.

“우리 막내 왜울어~ 엄마 걱정했어? 엄마가 너무 늦게왔지~”

그날, 울고있는 나를 안아주면서 엄마도 우셨다.

 ——–

우린 4년후 지핫방을 벗어났다. 내나이 중3때..

이모부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엄마가 뚝섬에 식당을 차리면서 전셋방을 얻고, 드디어 지상에서 살게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정말 못먹고 안쓰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우리식구들..

반찬이라곤 항상 김치하나에 된장국이였다.

가끔 통닭을 사줄때면 얼마나 기뻤던지…

식당일을 온 식구들이 팔걷어부치고 했다.

나도 방학때면 서빙보느라 내 청춘 다 바쳤다ㅎㅎ

그렇게 조금씩 일이 잘되어 엄마는 집도 사고, 자식들 결혼도 시키고,

언니오빠는 아이들도 낳고 잘 살게되었다.

우린 모이면 옛날얘기 하면서 웃는다.. 웃으면서 울고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

어렷을적 누구하나 삐딱선 안타고 서로서로 잘 챙겨주고 지금 현재까지도

잘 살아주고 있는 우리 언니오빠들이 너무너무 고맙고 소중하다.

온 식구들이 여주(고향) 아빠 산소에 가면 동네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고 대견해한다.

아빠죽고 애들이나 엄마나 못먹고 못살더니 저렇게 잘크고 화목한 모습으로 고향 찾아왔다고,,

난 우리 엄마가 너무너무 소중하고 훌륭하고 정말 사랑스럽다.

프레스 공장에 다니셨을때 손가락 절단사고가 있었다.

지금 그 손가락을 만지작 거릴때면 막 설움과 고마움이 북바쳐올라온다.

부디 오래 건강히 살아주셔서 자식들 효도(;;) 많이 받으셨으면 한다.

——–

제 나이  올해 서른..

이번 가을이면 엄마집으로 이사갑니다.^^

2002년,

도농동에 집을 사셨습니다.

같은 건물 2층엔 친언니가 집을 샀구요~

결혼하면서 친언니 집에 전세를 얻어 3년째 살고 있답니다.

가을엔 7층인 엄마 집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한답니다^^

서울나갔던 언니네 식구가 집으로 돌아오거든요~

엄마는 몇년전 식당을 그만두시고 집에서 쉬쉬더니 또, 너무 쉬니깐 몸이 아푸다면서

다시 뚝섬으로 가게 얻어서 나가셨드랬죠~

오늘 엄마 생각에 왠지 목이메이고, 마냥 눈물이 나는것이 가슴이 너무 먹먹해지더라구요..

아~~ 부디 엄마~~

오래오래 건강히 살아주세요..  그러면 더 바랄것이 없겠네요..

엄마~ 완전 사랑해!!!!

——————–

아~ 댓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전 어제 막연히 엄마생각에 눈물나고 가슴먹먹해서 이곳에 풀어놓았는데

제글이 이렇게 사랑받고 있을줄이야^^

신기하네요~ 많은 분들이 추천도해주시고 응원도 해주셔서~

“아고라에 글 니가 올린거 맞지? 내용을 보니 딱 너네~”

친구에게 이런 메세지도 받았습니다 ㅎㅎㅎ 아우~ 넷상 좁아좁아~~

이곳에서 고향분들도 많이 뵈고 아는 동네 나오고~ ㅎㅎ

댓글들을 읽고있자니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져 자꾸만 눈물이 맺히네요..

누구나 한번쯤 어려울때가 있을거에요..

그치만 어차피 다 지나갈 시간이고 일들입니다.

지나갈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를 위해 툴툴털고 일어나자구요!!

힘냅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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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1&articleId=1545
게섰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