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데 흐느껴 우는 소리가 귀에 들렸다.

‘먼 소리지?’

눈을 비비고 깨어보니 언니 오빠들이 눈물을 훔치며 “아빠~”하고 울고 있었다.

난 어리둥절해하며 왜그러냐며, 왜우냐며 영문도 모른채 따라 울었다.

엄마는 이미 졸도해 있었고 그 옆을 작은아빠가 지키고 계셨다.

“아빠가 돌아가셨어……. “

내나이 9살.. 우리아빠는 어느날 갑자기 우리곁을 영영 떠나버렸다.

——-

장례를 끝내고 학교로 돌아간 어느날, 반에선 학급비를 걷고있었다.

“쟤는 걷지말자, 아빠도 죽고 가난하자나.”

나만 재외시킨다.

애써 못들은척하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울먹였다.

4학년 여름 미술시간, 엄마들을 초대하는 시간이 있었다.

당연히 우리 엄마는 못오신다. 돈 벌러 나가야하셨으니까….

난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데 아줌마들이 설렁설렁 돌아다니시다 내 등뒤에 서신다.

“어머~ 잘그리네~ ㅎㅎㅎ”

“얘네 엄마가 연대리에 멸치팔러온 아줌마자나~”

“아 그래? 어~ 그렇구나~”

………………. 멸치??……………. 우리 엄마가??………………..

눈물이 고였다.

난 엄마가 멸치를 팔러 다니는지 머하는지 몰랐다.

그냥 일하러 나가는 것만 알았는데..

——–

버스는 왠만하면 안타고 다녔던 우리(작은오빠와 나)..

아니 그돈마저 없어 한시간 거리 학교를 더 일찍 걸어다녔다.

비가 많이 오던 어느날..

다른 엄마들은 우산 안가지고간 아이들을 찾아 교문앞에 서성이며 아이들을 맞이해준다.

우린 일찌감치 체념하고 운동화를 가방속에 넣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그러다 맘좋은 버스기사 아저씨를 만나 공짜로 얻어타고 가고 있는데

마을 어귀쯤에서 저 넘어로 우리 엄마가 보였다.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우산을 들고 검정장화를 신고 비닐우비를 입고…

비를 맞으며 빠른걸음을 재촉하시던 우리 엄마가 ..

“아저씨 차좀세워주세요”

팡팡팡~~ 작은 손바닥으로 버스를 쳐댔다.

그시간이면 애들 다 끝나고 집에 도착할 시간이란거 알면서

그때 가도 이미 늦었다는걸 알면서

머하러 그 비를 맞으며, 행여나 길 엊갈리면 어쩌려고 그러고 가셨는지..

“엄마~~”

버스에서 내려 달려오는 우릴 보시고 엄마는 놀라하셨다.

나는 너무 좋았다.

우리 엄마도 우리줄 우산을 들고 우리 마중하려 했다는 자체만으로

그냥 저냥 마냥 너무 신났다.

“태평리 장에 콩팔러 나갔다 오느라 늦었네~”

변변한 우산조차 없었던 우리집이였기에 콩팔아 우산을 사신거였다.

아직도 그때가 난 잊혀지지가 않는다.

가끔 이때 생각이 나면 어처구니 없을정도로 눈물이 나온다.

————–

 우리집은 가난했다.  재산이래봤자 시골집과 경운기 한대..

먹고살길이 막막해진 엄마는 우리 4남매를 데리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내나이 12살, 우리 큰오빠가 18살, 울언니 17살, 작은오빠 14살때..

그때 엄마가 시작한 일은 식당 설겆이 일이다.

언니와 큰오빠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낮엔 일을했다.

엄마를 도와야한다고 스스로들 결정을했다.

서울로 전학온 나는 도시락을 자주 못싸와 점심을 참 많이도 굶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면 운동장에 나가있고 그랬었다..

하루는 담임선생님이 나를 부르며 넌 왜 도시락을 안싸오냐고 막 다그치셨다.

왜이렇게 서럽지? 막 눈물이 났다.

손을숙선생님..내일도 안싸오면 혼날줄 알라는 선생님의 말씀에 전 내내 두근대고 떨리는 가슴으로

다음날 점심시간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밥을 좀 굶어서 그렇지 내성격은 언제나 활발했구 명랑했다.

오히려 겉으론 더 씩씩하게 굴어야했다..

이것마저도 아니면 난 너무 불쌍해보일게 분명하니깐,,,

———

성수 2가 3동..

완전 지하 단칸방이 우리 집이였다. 보증금 백만원짜리 월세방.

어느날, 일나간 엄마가 저녁 12시가 넘어도 들어오시질 않았다.

어린맘에 덜컥 겁부터 나고, 머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대문에 쪼그려 앉아 엄마 오기만을 마냥 기다리면서

‘설마 엄마가 우릴 버리고 도망간건 아니겠지, 설마 누구한테 납치된건 아니겠지,

설마 어디서 죽어있는건 아니겠지..’

가슴의 두근거림을 그 조그만 심장이 감당하기엔 너무 컸다.

1시무렵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난 곧장 엄마한테 달려가 안기면서 대성 통곡을 했다. 정말 너무 눈물이 났다.

“우리 막내 왜울어~ 엄마 걱정했어? 엄마가 너무 늦게왔지~”

그날, 울고있는 나를 안아주면서 엄마도 우셨다.

 ——–

우린 4년후 지핫방을 벗어났다. 내나이 중3때..

이모부와 외삼촌의 도움으로 엄마가 뚝섬에 식당을 차리면서 전셋방을 얻고, 드디어 지상에서 살게되었다^^

이때 처음으로 나는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정말 못먹고 안쓰고, 악착같이 돈을 모았던 우리식구들..

반찬이라곤 항상 김치하나에 된장국이였다.

가끔 통닭을 사줄때면 얼마나 기뻤던지…

식당일을 온 식구들이 팔걷어부치고 했다.

나도 방학때면 서빙보느라 내 청춘 다 바쳤다ㅎㅎ

그렇게 조금씩 일이 잘되어 엄마는 집도 사고, 자식들 결혼도 시키고,

언니오빠는 아이들도 낳고 잘 살게되었다.

우린 모이면 옛날얘기 하면서 웃는다.. 웃으면서 울고있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

어렷을적 누구하나 삐딱선 안타고 서로서로 잘 챙겨주고 지금 현재까지도

잘 살아주고 있는 우리 언니오빠들이 너무너무 고맙고 소중하다.

온 식구들이 여주(고향) 아빠 산소에 가면 동네사람들이 다들 부러워하고 대견해한다.

아빠죽고 애들이나 엄마나 못먹고 못살더니 저렇게 잘크고 화목한 모습으로 고향 찾아왔다고,,

난 우리 엄마가 너무너무 소중하고 훌륭하고 정말 사랑스럽다.

프레스 공장에 다니셨을때 손가락 절단사고가 있었다.

지금 그 손가락을 만지작 거릴때면 막 설움과 고마움이 북바쳐올라온다.

부디 오래 건강히 살아주셔서 자식들 효도(;;) 많이 받으셨으면 한다.

——–

제 나이  올해 서른..

이번 가을이면 엄마집으로 이사갑니다.^^

2002년,

도농동에 집을 사셨습니다.

같은 건물 2층엔 친언니가 집을 샀구요~

결혼하면서 친언니 집에 전세를 얻어 3년째 살고 있답니다.

가을엔 7층인 엄마 집으로 이사 아닌 이사를 한답니다^^

서울나갔던 언니네 식구가 집으로 돌아오거든요~

엄마는 몇년전 식당을 그만두시고 집에서 쉬쉬더니 또, 너무 쉬니깐 몸이 아푸다면서

다시 뚝섬으로 가게 얻어서 나가셨드랬죠~

오늘 엄마 생각에 왠지 목이메이고, 마냥 눈물이 나는것이 가슴이 너무 먹먹해지더라구요..

아~~ 부디 엄마~~

오래오래 건강히 살아주세요..  그러면 더 바랄것이 없겠네요..

엄마~ 완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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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댓글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전 어제 막연히 엄마생각에 눈물나고 가슴먹먹해서 이곳에 풀어놓았는데

제글이 이렇게 사랑받고 있을줄이야^^

신기하네요~ 많은 분들이 추천도해주시고 응원도 해주셔서~

“아고라에 글 니가 올린거 맞지? 내용을 보니 딱 너네~”

친구에게 이런 메세지도 받았습니다 ㅎㅎㅎ 아우~ 넷상 좁아좁아~~

이곳에서 고향분들도 많이 뵈고 아는 동네 나오고~ ㅎㅎ

댓글들을 읽고있자니 동병상련의 아픔이 느껴져 자꾸만 눈물이 맺히네요..

누구나 한번쯤 어려울때가 있을거에요..

그치만 어차피 다 지나갈 시간이고 일들입니다.

지나갈 시간에 얽매이지 말고 앞으로를 위해 툴툴털고 일어나자구요!!

힘냅시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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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story/read?bbsId=S101&articleId=1545
게섰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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