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엄마가 해준 게 뭔데!”

[한겨레] “엄마가 도대체 해준 게 뭐 있는데.”

항상 엄마에게 했던 말. 결혼 전까지 아니 아이 낳기 전까지 엄마 가슴 아물기도 전에 내 잘난 입으로 엄마에게 꼭 해야 내 속이 풀렸던 말들.

내 나이 8살. 난생처음 배를 탔다. 배에서 내려 무언가를 타고 도착한 곳은 산속이었다. 여기가 집이랜다. 엄마와 아빤 텐트보다 조금 큰 천막을 치고 아래에 짚을 깔고 요를 얹어 깔았다. 엄마가 계를 들어 돈을 불리려 했는데 엄마의 친구가 돈을 들고 도망을 간 것이다. 우린 하루아침에 집없는 천사들(?)이 되었다.

하지만 한동안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던 나는 엄마, 아빠와 산다는 것 자체가 즐겁고 마냥 행복했다. 그곳엔 중학교까지밖에 없어서 고등학생이었던 큰오빠, 작은오빠는 육지에서 학교를 다니고 나머지 5남매는 천막생활을 해야 했다.

이사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겨울이 왔는데 우리는 산속 개울의 얼음을 깨고 세수를 했다. 난 고양이 세수를 하고는 춥다며 천막으로 달려들어와 이불 속에 기어들어가 오들오들 떨며 다시 잠을 자곤 했다. 그러면 엄만 우릴 두들겨 깨워 아침 일찍이 이집저집서 얻어온 밥과 반찬을 비벼 밥을 주셨다. 그래서일까? 난 지금도 비빔밥을 제일 좋아한다.

학원도 대학도 못 가고
도시락도 못 싸가고…
엄마에게 퍼부어대곤 했지만
지금은 그 눈물이 가슴을 적신다

학교 친구들은 우리를 ‘거지새끼들’ ‘땅거지’라고 불렀다. 친구들의 놀림으로 난 집까지 울면서 오곤 했다. 그때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고아였던 아빠는 어릴 적 외할아버지를 만나 품바를 배우고 동냥질을 하며 뱀을 잡으셨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자랑스럽게도 인터넷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이 시대 마지막 거지대장 천장근(천팔만)님이시다.

어찌 됐든, 집이 생겨 거지새끼라는 별명을 면했는데 땅꾼이셨던 아빠 직업 때문에 뱀장수집 딸, 뱀집 딸이 나의 별명인 동시에 우리 8남매의 별명이 되었다. 아빤 마을잔치 때면 초대받아 품바공연을 하곤 했는데 큰오빠가 너무 창피하다고, 우리가 거지새끼라는 소리 듣고 다니는 게 좋냐며 화를 내는 바람에 아빤 되도록 품바공연을 하지 않으셨다. 그 이후로 난 아빠의 품바공연을 볼 수 없었다. (후회 막심, 나라도 배워놓을걸.)

어쨌든, 난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꿈과는 달리 엄마의 권유로 돈을 벌어야 했다. ‘왜? 대체 왜 난 언니, 오빠들처럼 대학에 안 보내준다는 건데?’라는 말은 속으로 외칠 수밖에 없었다. 큰오빠가 부모님을 설득해서 실업계 고등학교에 갔다. 주산, 부기, 타자 자격증을 따야 했지만 난 친구들처럼 학원을 다닐 수도, 타자기를 살 수도 없었다. 타자기가 없어 숙제를 못한 나는 늘 매를 맞았다. 정말 학교도, 부모님도 너무 싫었다. 그러던 중 엄마가 섬에서 올라오셨다. 학교에 갔다 방에 들어오는데….

“너 이리 앉아봐라!”

“왜?”

“너 납부금 냈어? 안 냈어?”

“…”

“이 가시나가 먼 배짱으로 3개월치 납부금을 다 까묵어불고, 너는 정신차릴 때까지 한번 맞아야 디야.”

엄만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도 질세라 “내가 머, 언니 오빠는 대학도 다 보내주고 납부금도 다 내주면서, 나는 학원도 안 보내주고 맨날 도시락도 못 싸가고, 배 고파서 다 까먹었다. 왜? 엄마가 해준 게 머 있다고 날 때리고 난리야!” 그때 난 농어가자녀 혜택으로 납부금은 3만원 정도였다.

“이년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그날 난 진짜 죽도록 맞았다. 세월이 지난 지금도 내 마음에는 어린 시절의 아물지 않은 상처가 남아 있다. 어느덧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거지라고 놀림받을 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우리 8남매를 키운 엄마, 아빠의 땀방울과 아직도 마르지 않은 그분들의 눈물을 이 글을 쓰면서 내 뺨에 흐르는 눈물 속에 느껴본다.

사람은 벼랑에 몰릴 때 내 편을 알수있다

올해 서른일곱의 남자랍니다.아직 결혼은 안했고 뭐 평범하다면 평범한 사람이지만 살아온 과정은 그닥 평탄친 않았네요.

이런 글 안올려도 되지만 그저 그냥 하소연이라 생각하시고 읽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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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조그마한 사업이지만 그래도 어디가서 아쉬운 소리 안하고 지금껏 잘 살아왔습니다.

어디가서 돈 빌려본 적 없고 늘 친구들이나 후배들, 사람들 만나면 술값내고 부족함 없이 살아왔었죠.

문제는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저축을 많이 못한게 문제였습니다.

솔직히 요즘 대한민국 직장인들,다들 힘드니까 그저 먹고 사는것만해도 감사해야하겠지만.

부모님 사업도 꽤 괜찮게 되고 있어서 아마 그거 믿고 이렇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몇 년전 아버지 사업이 갑자기 부도가 나면서 집안이 조금씩 기울어지기 시작했죠.

뭐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먹고 사는데에는 큰 지장은 없었습니다.

씀씀이가 줄어들었을 뿐,

그런데 작년에 거래처에서 어음을 부도내면서 하루 아침에 회사가 없어지고 제 아파트까지 처분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되더군요.

사업이란게 크든 작든 오르막길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하는거니까 그래도 젊은 나이에 포기하면 안되겠다 싶어 부지런히 뛰어봤지만 뜻대로 안되더군요.

자연스레 주위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기 시작했습니다.

생전 그런 얘기 안하던 제가 자존심 굽히며 부탁을 했지만 돌아오는건 아무것도 없이 오히려 제 소문만 안좋게 돌더군요.

하물며 전에 저에게 도움을 받았던 친구들조차 나 몰라라 모른척 하더군요.

올 4월, 완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 모든걸 정리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렇게 아무것도 안남는다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저 멍하니 넋 나간 사람처럼 몇 달을 지냈죠.

그러다 부모님을 보니 이래선 안되겠다 싶더군요.

어차피 결혼도 안한 몸이라 딸린 식구도 없겠다 싶어, 무작정 모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그때 13만원인가 있었죠.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정말 공사장 막일이라도 해야겠다 싶은 심정으로요.

서울에서도 물론 할수 있었지만 차마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치 않아 그저 지방으로 갔습니다.

돈도 없고 하니 잠은 찜질방에서 자고 밥은 하루 두 끼.

젤루 싼 곳을 찾아 이천원 정도에 해결하면서 아침 인력시장을 출근하다시피 갔습니다.

사투리도 안쓰는 외지인인라 어디는 아예 쓰지도 않고, 암튼 3일을 잡부로 나가서 소개비 빼고 오만오천원 씩 십육만 오천원을 벌었습니다.

그날 혼자 이천팔백원 짜리 삽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흐르는 눈물은 어쩔수가 없더군요.

설사가 나서 평소엔 즐겨먹지도 않았던 그 삼겹살.

어딘지도 모르는 외지에서 혼자 이렇게 먹게될지는 정말이지 꿈에도 상상 못했었습니다.

그나마 그 일도 그 이후론 끊어지고 지역정보지와 인터넷으로 일자리를 수도 없이 알아봤지만 나이 제한에 지역 연고가 없는 사람이라고,또 길게 일할 사람이 아닐것 같다란 생각에 그 흔한 편의점 알바 자리도 구하질 못해ㅆ습니다.

시간은 흐르고 수중에 있는 돈도 거의 떨어지고…

돈 아낀다고 5천원 짜리 형편없는 시설 찜질방에서 자니 등은 담이 결리고 어떤 날은 다음 날 잠잘 돈이 없어서 밥을 먹지 못해 찜질방 한 쪽 매점에 있던 달걀 세 개를 훔쳐먹고는 소리 없이 울곤 했습니다.

하루 종일 먹은게 고작 달걀 세개라니.

그때도 집에 가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습니다.

적어도 집에 가면 밥은 먹을수 있는데.

그래도 적어도 내가 할수 있다는 의지 정도는 보여야 한다라는 생각으로 버텼습니다.

은행 4군데 잔고를 몽땅 털어보니 만오천원도 안되더군요.

그 은행 네군데 찾느라 두 시간 이상을 걸어다니고.

그 날 역시 일자리를 잡지 못했습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할수 없는걸 알게 됐을때 어쩌면 그렇게 세상이 매정하던지.

역시 찜질방으로 돌아왔는데 돈을 내고나니 이천원도 안남더군요.

그 날 역시 달걀 세 개.

전에 훔쳐먹고 난 후 주인이 눈치를 챘는지 퇴근도 안하고 연장 영업을 하더군요.

천원 주고 세 개를 샀습니다.

구석에서 생수와 함께 먹는데 정말 아무 생각 안나더군요.

담배는 사람들한테 하나 씩 얻어피우고.

그런데 의외로 장기 손님들이 꽤 있더군요.

대부분이 막일이나 화물차 운전자들이더군요.

다음 날 24시간이 되어서 나갈 시간이 됐는데 주머니에는 동전 몇 개 있고 여기서 나가면 정말 노숙자 밖에는 안되겠다 싶어 일단 하루 더 머물렀습니다.

다행히 전화기는 밀린 요금이 있었지만 통화는 할수 있더군요.

다시 한 번 자존심 구겨서 친구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부탁을 했지요.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고.

20통 이상의 전화를 했지만 돌아오는건 전부 없다란 말뿐이었습니다.

세상에 직장 다니는 놈들이 돈 오만원이 없다라는게…

그때 다시금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없는게 아니라 주기 싫은 거구나…

나한테 몇백만원 씩 빌려갔던 놈들도 그렇게 차갑게 돌아서는걸 느끼며 정말 결심했습니다.

언젠간…정말 언젠간 내 지금 받았던 이 수모, 전부 다 돌려주겠다 하구요.

꼬박 하루를 뜬눈으로 지새다 다른 친구 몇 명에게 참 부끄럽게도 오만원만 보내 달라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답은 하나도 없더군요.

서러워서, 내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나 그 생각에 서러움이 온 몸을 감싸더군요.

일단은 여기서 나가야 하는데란 생각이 들면서 정말 어찌어찌해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업주분에게는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렇게 나온 새& #48340;길을 하염없이 걸었습니다.

최대한 그곳과 멀리 멀리…

혹시나 날 & #51922;아오지는 않을까란 생각이 들어서요.

한참 걷다보니 어느새 아침이더군요.

다리도 아프고 길에 주저 앉았습니다.

정말 노숙자가 따로 없더군요.

길에 있는 담배 꽁초를 주워 피면서 차라리 담배나 끊을걸 이런 추접스런 모습을 보이다니 하며 또 한숨만 지었습니다.

그러다 정말 마지막으로 한 친구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문자를 보냈던 친구 중 하나.

출근 준비하나보더군요.

문자 못본줄 알고 사정을 애기하자마자 돈 보낸지가 언젠데라고 하는겁니다.

친구가 십만원을 문자 받자마자 보냈는데 전화를 못했다며…

더 필요하냐구…

그 친구하고는 평소에 자주 만나지도 못했던 미안한 친구였는데…

고맙다고,정말 잊지 않을거라고 얘기하니까 오히려 더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하더군요.

큰돈은 못해주지만 어느 정도 더 필요하면 지금 보내준다는걸 괜찮다 하면서 끊었습니다.

밥을 몇 끼를 걸렀는데도 배고프단 생각은 안들고 그저 눈물만 흐르더군요.

그렇게 버스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우등요금이 아까워서 1시간을 넘게 기다려서 일반으로 타고, 오랜만에 따뜻한 밥도 한 끼 사먹고.

버스 안에서도 흐르는 눈물은 주체할수가 없더군요.

지난 두 달이 채 안된 그 시간동안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이 떠올려지며 그렇게 집으로 오는 차안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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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뭐하냐구요?

직장 나간지 한달 이 조금 안됐네요.

직장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수산시장에 밤늦게 나가서 아침까지 일을 합니다.

시간에 비해서는 몸은 좀 피곤하지만 보수는 괜찮은것 같아요.

요즘은 삼겹살도 잘 먹습니다.

집에 있으니 잠자리와 밥 걱정은 안하니까요.

인생역전, 그런건 없더군요.

복권을 3주 째 천원짜리 하나만 사는데 지난주에는 4등인가요?

그게 되어서 4만원 가량 받았는데 너무 기분이 & #51327;더군요.

그렇게 소중한 값어지란걸 모든걸 잃고나서 알게 되니 나란 사람, 참 어리석은 사람인것 같습니다.

모른척하고 등돌렸던 그 친구들은 여전히 연락을 안합니다.

20년이 넘은 우정이 결국엔 깨지게 된건데 후회는 없습니다.

이번 일로 인해 정말 진실된 내 편이 누군지 알게 됐으니까요.

그걸로 족합니다.

빌릴 때는 당연시하며 빌렸던, 또 저도 아무런 꺼리낌없이 빌려주었던 그때의 그 친구들.

막상 내가 손을 벌리니 나 몰라라 하는건 그냥 그렇게 생각하렵니다.

세상이 힘들어서 그런거지 이 친구들이 나쁜 친구들은 아니다라고.

다 잊기로 했습니다.

용서하고 안하고의 문제는 아니지만 그저 마음 속에서 다 털어버리고 열심히 살 생각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다시 올 내 성공을 꿈꾸며 전처럼 그들을 대하지 못할 거란것도 다짐해봅니다.

하루 달걀 세 개로 끼니를 때웠던 그날들을 기억하며 오늘도 힘차게 근무지로 향하렵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세이클럽 음악방송에는 많은 CJ분들이 계십니다. 저 역시 그 중에 하나구요.

그런데 한달 전쯤인가 호화스럽게 방제를 꾸민 다른 방들과 달리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음악이라는 방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 방에 들어가려고 들어간 것이 아니라 클릭미스로 방을 잘못 들어간 것이 인연이 됐죠.
그분은 22살의 남자 분이었습니다. 동원대휴학생이라고 더군요.
그분은 비록 최신가요와 댄스 곡을 틀진 않았지만 그분의 방에는 언제나 4~6명의 사람들이 함께 방송을 듣곤 했습니다. 성우처럼 멋있는 목소리도 아니고 재치있는 멘트도 없었지만 그분의 따뜻한 마음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보름쯤 그분의 방송을 들었을 때쯤 어느 날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방에 들어와 하소
연을 하더군요.자기 엄마가 폐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는데 보험료와 생활보조금으로는 수술비와 병원비가 턱없이 부족하다구요. 전 그때 장난치는 줄 알고 그냥 흘려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CJ님은 그 말을 귀 기울여 듣고는 어느 병원에 입원하셨냐고 물어보고는 방송을 저한테 맡기고 그 병원으로 가셨습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남남인데 자기 일처럼 다른 일은 제쳐두고 가셨습니다. 그분 역시 생활이 어려워 대학교 학비를 마련 하려고 휴학을 했는데 그동안 모은 학비를 여자아이의 엄마 수술비에 쓰셨고, 그것도 모자라 4일 동안 간호를 하셨습니다.

여자 아이의 엄마가 눈을 뜨던 날 그분은 멀리서 지켜보고는 병원을 나오셨답니다. 다시 방송을 하다가 1주일 쯤 지났는데 어쩐 일인지 그날 이후 그 분이 보이지 않더군요. 1 주일이 지나고 그분의 방제와 같은 방이 있기에 저는 반가워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방에 CJ는 그분이 아닌 하소연을 하던 여자아이였습니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지훈이 오빠가 우리 엄마 모자른 입원비를 위해 피자배달 도중 빗길에 미끄러진 트럭에 치어서…정말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다 스피커 사이로 그분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제 귀를 의심했는데 정말로 그분의 목소리였습니다. 그 마지막 멘트는 그분이 하
늘나라로 가시던 날 아침에 녹음해두신 것을 여자아이가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내 가 그 여자아이를 도운 것은요. 저희 어머니도 돈이 없어서 치료를 못 받고 돌아가셨어요. 전 또 다른 아이가 상처받는게 싫어 도왔어요. 여러분도 자기가 도울 수 있다면 뭐든지 해 보세요. 세상에는 나보다 더 못한 사람이 많아요. 그럼 비가 내 리는데 모두들 감기 조심하시구요. 전 아르바이트 때문에 그만 가 보겠습니다.”

천사 같은 마음을 가진 지훈형의 명복을 빕니다.
세이클럽 세이에세이 CJ민이(iysm2001)님께서 남기신 글

팔 없는 수영선수


나보다 못한 사람은 없다.

…..언젠가 어느 책에서 읽은 글귀가 생각난다.

단순한 글귀였는데…어떤 책인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리산 등반에 대한 이야기였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겨우 지리산 정상(…정확히 무슨 봉인지는 모르겠다.)에 올라서서 산을 정복했다는 기쁨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 어느누가 나지막히 적어놓은 글이 들어왔다.

– 이곳에서….대자연 앞에서 나의 초라함을 보았다. 이제 다시는 누구앞에서도 자만하지 않으리.

….이런 내용이었다.

몇 줄 안되는 글귀지만….생활의 신조로 삼고있다.

– 나보다 못한 존재는 없다. 항상 자신을 낮추고 배움의 자세에서 모든것을 대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