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졸리기 보다는 긴장감이 앞선다. 낯선땅에서의 첫 라이딩.
지도 하나만을 의지하며 나선다.

서둘러 빨리 마닐라를 벗어나려는 마음과는 반대로 시작부터 삐걱댄다. 익숙하지 않는 주소 표기 방법들.
어제 하루동안 연습을 했다고는 하지만 마닐라를 벗어나기에는 많이 모자랐다.

길묻기.JPG
처음이 힘들지…한번 말트기 시작하면 점점 길묻기에 재미를 느낀다.

스트리트와 애비뉴로 구성되는 마닐라 시내에서 한국인이 길 찾기란 까다로운 일이다.
열심히 달리고는 있지만 계속 제자리만 뱅뱅 도는 느낌이다. ….실제로도 돌고 있었고.

나의 트레이드 빨간 목장갑.JPG
빨간 목장갑은 나의 심볼! 값싸고, 질 좋고, 안 미끌어지고!

똑같은 장소만 3번째쯤 돌았을까… 설상가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쯤이야.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것.
상관없이 그냥 달린다. 그런데 가방에 방수커버를 씌우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가방이 쫄닥 젖었다.

아따 비많이 온다.JPG
비온다…또 비온다…

오전 10시까지 마닐라만 계속 뱅뱅 돌고 있던 것 같다. 건물앞에 서있는 가드(Guard)들에게 길을 물어보고 달린다. 하지만 역시 뱅뱅이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가까스로 마닐라 시내를 벗어난다.

더이상 시가지가 보이지 않고 쫙 뻗은 도로가 우리를 상쾌….하게 하지는 못했다.

필리핀의 대중교통수단… 지프니와 트라이시클. 참 많다. 엄청많다. 그런데 그 차들이 그렇게 좋은 매연을 뿜는게 아니다. 무엇인가… 검은 악의 기운이 배기구에서 흘러나오는데… 지프니 뒤쪽에 자전거가 서있을때 느껴지는 배기구의 따뜻한 매연… 내 다리가 검게 물들어 가는 것이 느껴진다.

게다가 비까지 계속 오고 있으니, 땅은 물로 덮혀있고, 속도를 낼때마다 어김없이 튀어올라오는 작은 부스러기들… 이해한다. 그런데 이 부스러기가 흙이 아니다. 흙이 아닌… 검정색의 찐득한 느낌의 ‘무엇인가’다. 얼굴에 튀고, 눈에 튀고, 입에 튀고… 뭐 이해한다. 아니, 이해해야지. 오늘만 이러는게 아닐것 같으니…빨리 익숙해지는것이 좋은 것이다.

이 날 기억에 남은 선배의 한마디…
“마스크 사자니까..”

12시쯤 Chow King(필리핀의 중국요리 패스트푸드점)에서 가볍게 점심 식사를 하고 다시 달리려는데…. 사소한 문제가 생겼다. 마닐라를 빠져 나온것은 맞는데 반대로 달린것.

쫄딱젖은 후배.JPG
Chow King 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고생한다 자전거.JPG
니들도 고생한다. 제일오른쪽에 있는 빅뱅7 자전거가 후배녀석꺼. 짐받이 안장…으이구!

이때부터 지도와 나침반을 함께 사용했다. 무조건 동남쪽으로 가자면서…(우린 서남쪽으로 달렸다…)

지금은 유턴중.JPG
나때문에 꽤 많은 길을 다시 돌아가야 했다. ㅋㅋㅋㅋ

필리핀에서 지프니는 우리나라의 버스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값이 싸고, 많은 수가 운행을 한다. 그런데 그 수많은 지프니 중에서
모습이 같은 지프니를 찾기란 힘든 일이다. 운전자의 취향대로 가지각색의 지프니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거의 차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 기스같은 것들이 많이 나있다. 그래서 그런걸까… 우리들이 뒤에서 자주 꽝꽝 박아도 운전자들이 아무렇지 않게 그냥
가더라. 만약 벤츠나 페라리에 박았더라면 ㅎㄷㄷㄷ…

지금와서 생각하는데 자전거를 타기에는 우리나라보다 필리핀이 더 좋았던 것 같다.
도로에서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자동차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당당하게 신호를 대기하고(…가끔씩 신호도 무시하고;;) 해도 전혀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곳에서는 자전거도 하나의 Vehicle(차량)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때문에 나중에 한번 당하긴 했지만..

아무튼, 이번엔 제대로다. 제대로 방향을 잡고 신나게 달려…보려고 했으나 후배녀석, 안장이 문제다.
값이 싸다고 구입한 싸구려 중국산 짐받이 안장. 첫날부터 시작해서 끝나는 날까지 문제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추천하지 않는 부붐 베스트 넘버 1이다.
짐받이 안장은 비싸더라도 좋은 것을 사기 바란다. 반드시.

안장뿐이었다면 좋았을텐데 문제는 후배녀석에게도 있었다. 자전거를 잘 타지 못한다는 것. 내가 선두, 후배가 중간, 선배가 후미를 맡아 달렸는데 후미에서 오는 선배가 가슴이 조마조마 했단다. 후배의 드라이빙 실력에.. 하지만 나는 앞에 있어서 못봤으니, 그냥 쓩쓩 달렸다. 그저 후배녀석 많이 늦네… 이정도로만 느꼈었다.

길가의 식당.JPG
길가의 이름없는 식당. 착하고 친절한 사람들이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노래방 기계. 거의 모든 집에는 노래방기계가 다 있다.

평균 시속 16~18 km/h 의 속도로 달린것 같다. 오르막이 있는것도 아니고, 계속되는 평지였는데 부진한 성과다. 오늘하루 바탕가스까지 가려고 했으니 무리. 중간에 있는 칼람바라는 지역에 도달하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제는 호텔을 알아볼 시간이다.

날이 더 어둡기 전에 호텔을 찾아본다. 이곳에 물어보고 저곳에 물어본다. 마닐라를 벗어나니 필리피노들의 얼굴에 웃음이 보이기 시작한다. 일부러 기회를 만들어 한마디라도 더 말을 붙여본다. 최대한 빨리 필리핀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야 한다. 여행내내 두려움만 안고 다닌다면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다행히 호텔 하나의 위치를 알 수 있었다. 운이 좋아 전화까지 할 수 있었는데 500~800페소쯤 했던 것 같다.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안난다. 기억이 나는건 값을 깎는 답시고, 어줍짢은 영어로 쇼부를 치다가 실패했다는 기억뿐… 지금 생각하면 그곳 물가로도 비싼가격이 아닌데 왜 그렇게 깎으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ㅋㅋㅋㅋ

전화로는 한번 면박을 당했다. 이제는 어쩌나…직접 찾아가서 원래 가격에 묶기로 한다. 다들 지쳐있다.

하지만 그곳으로 가는 와중에 여행동안에 단 한번 찾아온 엄청난 행운을 만나게 된다. 하룻밤 민박을 하게 된 것. 호텔로 가는 길을
물어본 것이 인연이 되어 그곳 주민의 호의로 하룻밤 묵어갈 수 있었다. 그런 행운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처음에는
적잖이 긴장했지만 엄청난 호의로 긴장감을 풀 수 있었다. 필리핀의 진짜 생활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

필리핀 가정집.JPG
마미는 요리중!

나이를 많이 드신 아주머니셨는데 자기를 편하게 Mommy로 불러달라고 했다. 여행온지 삼일만에 새엄마가 생겼다. 이대로 가면
내일쯤엔  애인이 생길것 같다. 한국에서 25년이 넘도록 못만들었던 애인을 이곳에는 일주일안에 만들 수 있겠다. 참 좋은 곳이다. ㅋㅋㅋㅋㅋ

마미랑 빨래.JPG
마미랑 빨래중! 정말 잘해주셨다. 고마워요, 마미!!

평범한 가정집이다. 우리를 재워준다니 뭔가 보답을 하고 싶다. 저녁을 사주겠다고 하니, 집에 가스가 없어서 요리를 못한단다.
가스부터 사러간다. 우리가 사용하는 LPG가스통의 전반 정도의 사이즈에 똥똥한 모습이다. 가격은 475페소(우리돈 14250원)

마미.JPG.
우리 마미! 🙂

이제는 음식 재료를 사러 간다. 라푸라푸(우리나라의 다금바리)를 산다. 3kg에 130페소(우리돈 3900원). 정말 싸다.
마미와 집근처 시장에 같이 가서 음식재료를 사는데 참 재미있다. 퍼덕퍼덕 살아있음이 느껴진다. 바로옆 과일가게에서 샀던 필리핀 바나나도 정말 최고다.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바나나랑 많이 틀리다. 텁텁한 뒷맛이 없는 것이 꼭 새콤달콤 먹는 기분이다.

이윽고 저녁시간. 필리핀의 전통요리 시니강이다. 시큼한 국물맛이 특징이다. 그런데 우리만 식사를 먼저한다. 다같이 모여서 식사를 함께하자고 해도 괜찮다고 한다. 먼저 먹으란다. 겸상하지 않는것이다. 배려일까? 문화일까?

호기심이 일기는 그들도 마찬가지인가보다. 어떻게든 우리말을 이해하려 애쓰고,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표현하려 애쓰니 영어를 잘하고 못하고는 큰 문제가 아니다. 그들과의 대화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정말 기분좋고 재미있는 저녁이다.

이제 필리핀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졌다. 본격적인 여행이 시작된 첫 날부터 이런 행운을 겪다니, 좋은 느낌이 든다. 이 여행, 뭔가 얻어가는 것이 한두가지가 아닐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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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on 필리핀 자전거 여행기 1/8 (목) (여행 삼일째)

  1. choi seo soo says:

    그렇긴해 ㅋㅋ 그들두 우리와 좀더 이야기 하고 싶었을테고 우리도 그들과 좀더 친했다면 좋았을껀데…….. 난 정말 너무 미친듯이 잠아왔거든 ㅋㅋㅋㅋㅋㅋ
    솔직히 말거는것도 짜증났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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